한국인에게 종종 쏟아지는 ‘냄비’라는 비난은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차가워진다는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삶의 전체를 뒤흔드는 외부 세계의 위기와 위기가 불러오는 불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위기가 한풀 가라앉으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일상을 일구는 우리만의 강인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포항시는 코로나19가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진자가 속출함에 따라 지난 21일 포항시청 대회의실에서 이강덕 시장의 주재로 긴급 읍·면·동장 대책회의를 갖고 향후 대응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포항시는 코로나19가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진자가 속출함에 따라 지난 21일 포항시청 대회의실에서 이강덕 시장의 주재로 긴급 읍·면·동장 대책회의를 갖고 향후 대응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한국인에게 종종 쏟아지는 ‘냄비’라는 비난은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차가워진다는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삶의 전체를 뒤흔드는 외부 세계의 위기와 위기가 불러오는 불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위기가 한풀 가라앉으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일상을 일구는 우리만의 강인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설 명절을 전후로 시작된 코로나19의 위기는 하루가 지날수록 급박해진다. 잠시 진정되었나 싶었더니 대구와 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사회 감염 사례가 확산되었고, 이제 대구 경북지역은 코로나19 폭풍의 핵이 되어 일부 병원과 응급실들이 폐쇄되고 확진자의 동선을 따라 곳곳이 폐쇄되는 상황이 줄을 잇고 있다. 뉴스 특보의 바쁜 호흡만큼 이를 지켜보는 우리의 맥박도 빨라지는 것 같다. 상가 골목과 음식점에서는 손님들을 찾기 힘들고, 문을 닫은 곳 조차 많다. 생필품을 판매하는 슈퍼와 마트 또한 예외는 아니다. 슈퍼에 들어서면 전시된 상품들조차 여느 때와 다르다. 곳곳에 텅 빈 선반들이 눈에 띄고 수량을 제한하는 품목들도 보인다.

마스크를 끼고 잔뜩 웅크린 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며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2020년 2월 오늘의 카랑카랑한 뉴스 특보가 불러일으키는 불안과 흥분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임에도, 혹은 이러한 상황이기에 더욱 거세지는 정쟁의 수위 높은 발언들과 대구 경북 봉쇄를 운운하는 누리꾼들의 발언들은 심장박동을 더욱 빠르게 몰아간다.

아마도 우리는 흥분 중인 것 같다. 패닉(panic)이라는 용어 대신, 흥분(agitation)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이러한 불안과 흥분이 처음이거나 낯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 글에서 수우족과 유록족의 비교를 통해 우리 사회가 개인 내면의 내적 질서보다는 세계의 외적 질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세’와 시류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능동적 행위자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근대로의 급격하고 비정한 변화, 그리고 아마도 그 이전의 시간과 또한 그 이후의 시간에도 경험해 온 크고 작은 침략과 삶의 터전을 뒤엎는 위기들. 이러한 격동에 대처해야 했던 경험들은 우리 유전자의 어디쯤에, 혹은 우리 교육과 양육방식의 어디쯤에 생존을 유지하고 적응을 용이하게 하는 급격한 흥분과 금새 잊고 돌아서서 다시금 삶을 시작하게 하는 습성을 남겨놓은 것 같다.

한국인에게 종종 쏟아지는 ‘냄비’라는 비난은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차가워진다는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삶의 전체를 뒤흔드는 외부 세계의 위기와 위기가 불러오는 불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위기가 한풀 가라앉으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일상을 일구는 우리만의 강인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 2월 코로나19의 위기가 가져오는 불안과 우리 안의 흥분은 결코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뉴스 특보를 집에서 혼자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뉴스를 모든 사람들과 함께 지켜보는 것 같다고 느끼는 착각 또한 착각이 아닐 것이다. 외부 세계의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우리의 이웃과 주변의 움직임에 민감한 속성. 이러한 특성이 집단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의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각자가 가진 내적 질서만큼이나 우리를 둘러싼 집단의 움직임과 집단의 외적 질서가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 경험하는 흥분은 결코 개인주의적 흥분이 아니며, 집단적 형태의 그 무엇쯤으로 느껴지는 흥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적 대응이 가지는 신속함과 일사불란함 속에서 이번의 위기 또한 잘 헤치고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의 의식의 저변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더더욱 코로나19의 위기는 결코 패닉이 아닌 흥분으로 경험된다.

불확실성이 확실성이 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우리 사회가 보여 온 놀라운 적응력과 대응력은 ‘냄비’와 ‘대세 추종’이라는 이름으로 비난받아온 우리 사회의 속성에 대해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쉽게 흥분하는 것은 결코 흠으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쉽게 잊는 것 또한 결코 흠으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저 위기에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흥분만 했다면, 혹은 위기가 지난 후 과거를 까마득히 잊기만 했다면, 아마 우리의 역사는 오래 전에 명맥이 끊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점점 격해지는 정쟁의 듣기 거북한 목소리들과 봉쇄를 운운하는 논의들은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소리들은 흥분이 아니고 패닉이다. 혹은 자신의 불안을 주체하지 못하고 외부로 공격성을 전환시키는, 혹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집단적 공격성일 수 있다.

학교의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교실에서 집단 따돌림이나 학생들에 의한 집단적 교권 침해가 이루어지는 순간들은 종종 교실에서 팽배해진 불안들이 그 공격성을 누군가에게 돌렸을 때이다. 더욱 어이없는 상황은 그 피해자가 전학을 가거나 교직을 떠나면, 그 피해자를 대신하는 누군가가 다시금 들어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개입은 여러 가지 방향과 형태로 이루어진다. 개인적 접근을 우위로 할 수도 있고, 집단적 접근을 우위로 할 수도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상담을 받게 하거나, 강력하게 반을 휘어잡는 교사를 투입하거나, 아이들이 공격성을 안전하게 배출할 수 있는 구조와 기회를 제공하거나, 사회적 기술 학습과 분노 조절 집단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등 말이다.

학교 따돌림과 폭력에서 피해자가 다시금 생겨나는 기제와 이에 대한 개입의 방법들은 그 자체로 무언가의 의미를 던져준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피해자의 많은 경우는 집단의 희생양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아이들이 속한 교실과 학교는 이러한 희생양이 번번이 생겨날 만큼 가혹한 곳, 즉 녹녹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급에서 이러한 희생양은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 가령 사회적 기술이 부족한 아이, 발달이 늦은 아이, 혹은 다문화 아이가 되기도 한다.

이야기를 다시 우리 사회로 돌려보자. 교실의 확대판인 우리의 사회는 쉽게 희생양을 만들어 우리의 불안과 공격성을 쏟아내는 속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위기와 불안에 직면하여 지역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선정적인 정쟁의 발언을 쏟아내는 일부의 모습은 우리의 불안을 희생양에게 전가시키는 패닉의 공격성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가진 것이 많다. 집단으로서의 신속함과 시간적 연속성 속에서 성장해 온 경험들과 수차례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온 힘이 있다. 경북지역의 대학과 초중고교는 모두 개강과 개학을 연기하였고, 아이들의 학원 또한 2월 말까지 휴업을 결정하였다. 폐쇄된 곳은 방역을 서두르고 있고, 문을 닫은 상가 또한 3월과 4월을 기약하고 있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불안하고 흥분하면서도 일상으로의 귀환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봄을 예기할 수 있는 능력은 아마도 우리가 가진 소중한 자산일 것이다.

/김은영(경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