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든 경북여성 (3)
남녀평등을 꿈꿨던 여성운동가정칠성 (上)

권번 시절 정칠성.

정칠성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여성운동가다. 20대 중반까지 기생이던 그녀는 3·1운동 이후 여성운동가로 변신했다. 1927년 전국적 여성 통일기관인 근우회를 이끌며, 계몽운동과 여성권익 향상, 나아가 항일운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운동의 방향을 제시해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바로 정칠성이 있었다.

20대 중반까지 기생 ‘금죽’으로
3·1운동이후 여성 운동가 변신
1927년 ‘근우회’ 창립
한국 근대여성운동 이정표 제시

△기생으로 성장해 여성운동가가 되다

금죽(錦竹)이라는 기생 이름을 가진 정칠성(丁七星·1897~1958)은 대구 출신이다. 그녀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기생학교에 들어갔다. 대구관찰사(대구시장)가 주최하는 행사에서 기생들의 공연을 보고 스스로 기생의 길을 선택했다. 1800년대 후반부터 일본 유곽 문화가 상륙해 기생이 성매매와 연결되기 전만 해도, 기생(妓生)은 예능인과 동의어로 통했다. 여덟 살 소녀가 반한 대상은 예능인으로서의 기생 직업이었다. 군청과 도청 행사에 빠지지 않고 초청되는 등 유명세를 떨쳤던 그는 1915년까지 대구에서 기생 생활을 하다가 18세 무렵 상경해 한남권번(漢南券番)에 등록했다.

기생으로서 정금죽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녀의 존재는 단연 두드러졌다. ‘별건곤 ’8월호(1927년)에 따르면 정칠성은 17세에 승마를 배우는 파격성을 보이기도 했다. 또‘개벽’에 실린 ‘경성의 화류계’라는 제목의 글에는 그녀가 단발미인으로 장안에 화제가 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칠성은 기생의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3·1만세운동 뒤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1922년 동경(東京) 영어강습소에서 공부했다. 이때가 26세다. 이듬해 1923년 고향 대구로 돌아온 그녀는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했다. 특히 정칠성은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거듭났다. 그해 10월‘대구여자청년회’를 창립하고 대구 첫 독립 여성단체를 조직한 뒤 계몽운동을 벌였다. 여덟 살부터 기생으로 살던 정칠성이 그 틀을 깨고, 여성운동가로 바뀐 것이다.

근우회.
근우회.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이 되다

정칠성은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됐다. 이는 그녀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본격적인 여성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여성동우회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해방을 내세우며, 정종명·허정숙·주세죽·정칠성 등이 1924년 5월에 조직한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다. 이 회는 한국의 여성이 노예상태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여성의 인간적·경제적 평등권을 주장했다. 여성동우회는 여성문제를 다룬 강연회와 여성노동자를 위한 위로음악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들의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강연회 등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금지조치를 당하기 일쑤였다. 정칠성은 이 회를 조직하고, 중앙에서 활약하는 한편 1925년 3월 경북 도단위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 결성에 참여했다. 이어 그녀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두 번째 일본행이었다.

동경으로 건너간 정칠성은 1925년 3월 동경 여자기예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여성사상단체 삼월회(三月會)를 조직했다. 이 회는 1925년 3월 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정칠성·이현경·황신덕 등 여자 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 여성단체다. 설립 목적은 조선무산계급 및 여성의 해방이었다. 삼월회는 1925년 12월 총회를 열어“조선 여성은 계급적 봉건적·인습적 압박의 철쇄에 얽매어 있으므로 무산계급 남성과 손을 잡고 인류의 압제를 근본적으로 모두 없애고, 대중 중심의 새 사회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방침 아래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이 있자 조사회를 만들기도 하고, 조선무산계급단체에 자금을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어 정칠성은 1927년 5월 근우회 결성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이는 여성운동의 전국적 통일기관이었다. 민족유일당으로서 신간회가 탄생하자 여성운동계도 통합을 추진해 1927년 5월 27일 근우회를 창립시킨 것이다. 근우회의 창립은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동아일보. 1930년 1월2일자.
동아일보. 1930년 1월2일자.

발기총회는 1927년 4월에 40인의 발기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여기에 정칠성이 참여했다. 이어 1927년 5월, YMCA 강당에서 회원 150명과 방청인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21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됐는데, 정칠성은 박신우·유각경·정종명과 함께 조직선전부를 맡았다. 기생 출신의 정칠성이 어느덧 여성운동계의 지도자급으로 성장한 것이다.

근우회는 강연회와 토론회·강좌 등을 통한 선전계몽활동, 노동여성 조직화 노력, 여학생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근우회 운동에 대한 일제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인해 활발한 활동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지도부는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 1930년 1월 정칠성은 학생운동 지도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허정숙·박호진·박차정 등과 함께 붙잡혀 구금되기도 했다.

어렵게 명맥을 유지하던 근우회는 신간회와 더불어 해소(해산)을 결정했다. 해소를 위한 회의가 개최되자 여기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여성운동이 근우회로 집중됐던 만큼 근우회 해소는 한국여성운동계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근우회 해산이후 1930년대 여성운동은 일제의 파쇼체제의 강화로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정칠성 또한 30년대부터 경성·평양·대구·통에서 편물강습 등으로 생활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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