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 마립간때 小國 정복 활발… 국가체제 기틀 다져
연맹왕국 신라, 서기전 1세기부터 동해안 진한 소국들 통일
2천년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국 사람들 운명 규명이 숙제

▲ 흥해지역은 2세기경 신라에 복속된 이래 신라의 팽창과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흥해지역에 위치한 남미질부성은 북쪽으로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해로(海路)로는 신라의 세력권이었던 강릉·삼척 등 동해안 방면을 연결시켜 주던 전초기지역할을 하였으며 영일만을 통해 침입해 오는 왜적을 방어하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붉은 선 안이 남미질부성) /포항시 제공

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께 건국되었다. 1천년의 왕국을 유지한 신라의 출발은 사로국이다. 경주를 중심세력으로 한 사로국은 오늘날 포항지역의 근기국, 다벌국, 초팔국 및 울산의 굴이화촌 등을 병합해 고대국가로 발돋움했다.

소국들은 이과정에서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경북동해안에서 성장하던 소국들과 진한연맹에 속하였던 소국들이 복속되는 과정은 어땠을까. 쌍수 들어 환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는 이에 반발해 돌발적인 행동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도 아니면 망명길을 택해야 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들 민족의 이동경로를 밝혀내는 것은 2천여년이 지난 이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또 다른 숙명이다.

글 싣는 순서
<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

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
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
3)경북 동해안의 소국
4)동예인들의 후예
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
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
8)고래의 고장 영일만
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
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

□서라벌의 여섯부락

삼한(三韓)중 한반도 동남쪽에 있었던 진한(辰韓)에서 신라의 기반이 된 서라벌의 여섯 부락은 씨족 집단으로 육촌(六村) 또는 육부촌(六部村)이라고도 한다. 육부촌은 유리 이사금이 32년에 부(部)로 개편 하였다. 이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은 양부(梁部)라 하며 이씨(李氏),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은 사량부(沙梁部)라 하며 최씨(崔氏), 취산의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지촌(干珍村)은 본피부(本彼部)라 하고 정씨(鄭氏),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은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牟梁)이라 하며 손씨(孫氏),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 혹은 加里村)은 한기부(漢祇部)라 하며 배씨(裵氏),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은 습비부(習比部)라 하며 설씨(薛氏) 이다. 그러나 6촌이 곧 6부로 변천된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대체로 부족사회의 6촌이 점차적으로 분화되어 단계적으로 행정 구역의 명칭으로 변화되어 간 것 같다.

신라의 건국과정에 대해서는 박혁거세에 얽힌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평범하게 풀이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원래 신라가 자리한 서라벌 지역에는 여섯 개의 촌이 있어 육부촌이라 불렸다. 각 촌에는 촌장이 있어 대소사를 관장하였고 6촌장들이 모인 화백회의가 있어 만장일치제로 6촌 전체의 문제를 결정하였다.

기원전 69년의 화백회의에서 6촌에는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법도를 모르니 임금을 추대하고 도읍을 세우자는 의견이 나와 이에 6촌장들이 산에 올라 서라벌 땅을 굽어보니 남산 기슭의 나정 우물가에 신비한 기운이 서려있어 모두 그곳으로 갔다. 우물가에는 흰말이 있었는데 6촌장들이 나타나자 말은 하늘로 오르고 우물가에는 큰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 알에서 건장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아이의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뭇 짐승들이 모여 춤을 추었으며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6촌장들은 아이의 이름을 박혁거세라 칭하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은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고 스스로를 거서간으로 정했다.

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된 후 어느 날, 샤량리의 알영 우물가에서 계룡이 나타나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여자아이는 얼굴이 아름답고 피부가 고왔지만, 입술에 닭의 부리가 달려있어 보기 흉했다. 사람들이 여자아이를 북쪽 시냇가로 데려가 씻기니 부리가 떨어지고 매우 고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아이가 자라 13세가 되자 왕후로 추대되었다. 아이의 이름 알영인것은. 사량리의 알영 우물가를 따서 지은 것이라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박혁거세와 알영의 나이는 같으며, 나라 사람들이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을 `성인`이라고 부르며 크게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신라를 탄생시킨 사로국

이상을 종합해보면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중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한다.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연맹왕국으로 시작한 신라는 서기전 1세기부터 차츰 삼국사기에 나오는 소국 들을 정복하면서 진한 소국들을 통일해 나가기 시작한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사료들을 이용하여 이를 추정해보면 신라는 남동쪽 방향에 있는 소국들을 먼저 복속시켜 나가는데, 이는 내륙에 있는 강국과 대결을 피하는 동시에 주로 정복에 필요한 전략적인 자원의 조달을 위해서였다고 풀이 할 수있다. 탈해왕대에 우시산국(지금의 울산지역)을 정복하였는데 이 곳에 달천 철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탈해왕대에 지금의 동래까지 남하하여 거칠산국(동래지역)을 정복하였다. 이는 왜와의 직접 교역을 하는 동시에 낙동강 교통로의 통제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파사왕대 임관군에 의하여 굴아화촌이 정복되었는데 오늘날의 울산 지역이다. 여기의 중요성은 울산항을 장악하여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고 소금 공급 지역을 확보 하려는 전략이 숨에 있었던 것 같다. 또 탈해왕 20년에는 황산진 (현재의 양산)에서 낙동강 하류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가야와 치열한 전투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황산진이 전략적 가치는 경주와 지형적으로 장에물이 없는 곳이며, 남동으로 동래지역과 통하고, 남으로는 김해를 통하여 바다로 나갈수 있는 매우 큰 이점을 갖춘 포구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파사왕 시기에도 가야와의 전투기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가야와도 쟁패를 다투는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어서 파사 23년(102년)의 기록을 통해 볼 때에는 현재의 포항지역과 삼척지역이 포함되는 옥저에서 동예를 거쳐 가야까지 통하는 해상 교통로 분쟁당시, 무역의 주도권은 가락국이 잡고 있었는데, 사로국이 울산-동래 해안을 미리 확보하였기 때문에 가락국의 간섭을 물리치고, 오히려 이 지역의 두 소국을 병합하여 포항에서 삼척까지의 동해안선을 얻게 되었다. 이 사실은 사로국 세력이 가락국의 세력을 뛰어 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립간의 정복활동

내물 마립간 (재위·356년~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 국가로써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99년(내물왕 44년)에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신라라는 나라 이름이 정하여진 것은 지증왕 4년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4년 겨울 10월-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고하여 지증왕대에 가서야 국호와 왕명이 정하여 졌음을 알 수 있다.

△동해안 소국들의 운명은

한편 이러한 시기, 경북 동해안의 존재하였던 소국들의 운명은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었다. 그들은 확장되는 신라 속에서 역사의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을까?

울진군이 밝혀놓은 울진군의 역사에는 소국 시대, 울진에 있었던 진한12국 중의 하나인 `우중국(優中國`, 또는 `우유국(優由國)`은 진한 연맹체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이후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사로국(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 후 신라의 영역에 소속되어 오다가 고구려 장수왕 때 잠시(468~481)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이때 울진지역은 `우진야현`(于珍也縣), 또는 `고우이·어진(御珍)`, 평해지역은 `근을어현`(斤乙於縣)이라 불렀다. 울진봉평신라비(524)에는 `거벌모라, 남미지촌, 갈시조촌, 아대혜촌` 등의 지명이 보이며, 창녕진흥왕척경비(561)에는 `우추`(于抽)라 하였다.

영덕군의 연혁에서 영해는 삼한(三韓)시대 진한의 소국인 우시국(于尸國)이라 칭하였고 고구려시대에 군(郡)으로 강등되었다가 신라 탈해왕(脫解王) 23년 (서기 79년)에 지방 관리(官吏) 거도(居道)가 반격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정유년(서기 757년)에 전국을 9주(州)로 나눌 때 주(州)로 개칭(改稱)하여 주장(州長)을 두면서는 유린군으로(有隣郡)으로 고쳐졌다고 하였다.

포항시사에서는 사로국은 제5대 파사 이사금(A.D 80~112)에 이르면 경주 세력으로는 처음으로 기병(騎兵)을 사용하여 “다벌국(흥해로 추정)과 굴아화촌(울산)을 취하여 하곡현(河曲縣)과 하서현(河西懸)을 두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고 하여 신라가 안강·영일·울산등 경주의 동남편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 것은 2세기경 파사왕대의 일로 생각된다고 추정하였다.

신라는 102년에 음즙벌국(안강)을 먼저 병합하였고 이어 굴아화촌(울산)을 공략했던 점을 감안하여, 2세기에 들어와 소국들이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시기에 영일만 유역의 소국들도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에 나오는 소국들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 학계에서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이병도씨가 다벌국을 대구(大丘)로 초팔국은 초계(草溪)로 본 것을 따르지 아니하고, 천관우(千寬宇)씨가 비지국을 안강(安康)으로, 다벌국을 흥해(興海)로 초팔국을 기계(杞溪)로 추정한 것을 따라, 이들 지역이 모두 경주에서 80리(里) 이내의 근거리에 자리 잡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파사왕대를 성장기로 보았을 때, 천관우씨의 설이 보다 더 타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로국이 경주를 중심세력으로 하고 오늘날 포항지역의 근기국·다벌국·초팔국 및 울산의 굴아화촌 등을 병합하여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소국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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