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숨은 보석, 봉화의 가을 이야기
백두대간 천혜의 자연을 품은 경북 봉화군은 높은 산 아래 맑은 물이 흐르는 태고의 멋을 간직한 고장이다. 태백산과 소백산이 둘러싼 봉화는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글을 읽으며 지냈던 선비와 충신, 효자와 열녀로 이름났다. 청정자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정자가 있을 만큼 문화유산이 가득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선조의 숨결이 묻어 있는 고색창연한 봉화로 여행을 떠나보자.
소금강이라 불리는 매혹적인 산 청량산
청량산의 천년고찰 청량사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있는 청량산도립공원은 봉우리마다 펼쳐진 수려한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룬다.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를 만큼 아름다운 산은 1982년 경북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2007년 3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돼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청량산 입구에 들어서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에는 마치 주상절리를 옮겨 놓은 듯한 절벽이 솟아 있다. 아름다운 절벽은 예부터 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서식해 학소대(鶴巢臺)라고 한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학소대와 좌우로 나란히 서 있는 금강대는 학소대와 자태를 견줄 만큼 비경이다.
청량산에는 가장 크고 긴 봉우리인 장인봉을 비롯해 자소봉 금탑봉 선학봉 자란봉 축융봉 등 12개의 봉우리가 첩첩이 산을 두르고, 봉마다 대(臺)가 있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 봉우리 동굴 속에서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마시고 더 총명해졌다는 총명수가 흐르고, 원효샘에서는 샘물이 솟는다.
신라시대 불교문화의 흔적 남아 있는 곳
고택과 산수유가 어우러진 띠띠미마을 경일봉 밑에 있는 김생굴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통일신라시대 글씨의 대가 김생이 이 암굴에서 9년간 글씨 수련을 했다고 한다. 김생은 어느 정도 실력을 쌓아 하산하려는데 길쌈을 수련한 청량봉녀가 나타나 실력을 겨루자고 했다. 굴속에서 불을 끄고 서로의 실력을 비교해보니 청량봉녀가 짠 천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김생의 글씨는 고르지 못했다. 부족함을 깨달은 김생은 1년 더 수련하고 세상에 나가 최고의 명필이 됐다. 붓을 씻었던 우물, 세필정도 남아 있다.
청량산에는 신라시대 불교 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높은 봉우리를 의상봉 보살봉 반야봉 문수봉 원효봉처럼 불교식으로 불렀다. 조선 중종 39년(1544),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열두 봉우리의 이름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불가의 산은 유가의 산이 됐다.
청량산이 불교의 요람에서 유교의 성지가 된 이유로 조선시대 최고 학자, 퇴계 이황을 빼놓을 수 없다. 퇴계는 어릴 때부터 청량산에서 글을 읽고 사색을 즐겼다. 도산서원에서 제자를 가르치면서 틈틈이 산을 찾았다. 도산서원을 세울 때 청량산과 현재의 도산서원 자리 중 ‘어디에 서원을 둘 것인가’를 고민할 만큼 청량산을 사랑했다.
공민왕당과 천년고찰 청량사등 역사 흔적 곳곳에
장대한 청량산에는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축융봉 일대에는 고려시대 공민왕이 쌓았다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군율을 어긴 죄수를 처형했다는 밀성대와 다섯 마리 말을 타고 순찰을 다녔다는 오마도,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공민왕당이 있다. 공민왕당에는 공민왕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벽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다.
산자락마다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빛난다. 천년고찰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예전에는 연대사(蓮臺寺)로 불리며 3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큰 사찰이었다. 연대사는 무너져 터만 남고, 연대사 부속 건물 중 하나였던 유리보전이 중심전각이 돼 청량사라는 사찰로 이름을 바꿨다. 유리보전은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모양의 소박한 건물로 개축됐다. 유리보전 현판 글씨는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을 때 쓴 친필이라고 한다.
예전에 최치원의 이름을 따서 치원봉으로 불리던 층암절벽, 금탑봉에는 소나무들이 층을 휘감아 암벽 층마다 뿌리를 내렸다. 그 아래에 있는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청량사의 암자로 663년 세워졌다. 금탑봉과 오랜 세월을 지켜온 응진전의 풍경은 청량산의 으뜸으로 여긴다.
청량사에서 응진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 청량정사는 퇴계 이황을 기리며 조선 순조 32년(1832)에 세웠다. 퇴계 이황을 흠모하던 학자들이 성지순례하듯 다녀가며 학문과 수양을 쌓았다. 1896년 청량의진이 조직돼 의병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청량사 유리보전 옆길로 이어진 가파른 산길 끝에 오르면 하늘과 가장 가까운 다리를 만난다. 2005년에 놓은 하늘다리는 해발 800m의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산악 현수교다. 다리를 건널 때 골짜기에서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서늘하지만 100명이 동시에 지날 수 있도록 안전하게 설계됐다.
고산 아래 펼쳐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춘양면 서벽리에 넓게 자리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높은 산 아래 골바람이 세고 차서 ‘한국의 시베리아’라고 불린다. 백두대간의 봄은 더디 오고, 봄볕은 짧게 지난다. 그런 이유로 수목원에서는 매화부터 개나리, 진달래, 벚꽃까지 제 차례를 잊고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트렸다.
수목원은 백두대간 호랑이를 형상화한 트램을 타고 돌아볼 정도로 넓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의 이점을 살려 백두대간에 자생하는 고산 식물들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다. 돌이 많고 분수가 솟는 암석원에는 해발 1500m 높이에 사는 900여 종의 고산식물이 돌 틈새에서 자라고 있다. 암석원의 높이는 해발 550m지만 해발 1500m와 똑같은 환경을 조성해 지구온난화로 사라져 가는 나무와 야생화를 심었다.
수목원이 조성되기 전, 동네 서낭당 자리에 있던 금강소나무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550년 된 철쭉군락지와 꼬리진달래군락지에서 화사한 꽃잎이 열리면 백두대간은 찬란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을 담은 사계원,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서 서식하고 있는 나무와 야생화를 심어놓은 백두대간 자생식물원에서 진귀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산책길에는 멸종위기 야생식물, 미선나무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호랑이 숲으로 가는 길에는 자작나무 숲이 우거졌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숲에서 깊은숨을 들이쉬면 폐 속까지 시원하다. 숲을 나오면 흔히 볼 수 없는 고산식물인 만병초가 살고 있다. 만병초는 5월 중순에 꽃망울을 터트린다. 만병초원을 지나면 백두대간의 상징인 호랑이를 만날 수 있다. 백두대간 중턱 4.8㏊ 숲에 백두산 호랑이가 야생 그대로 지낼 수 있는 숲을 조성했다. 자연에 풀어놓은 암수 한 쌍의 호랑이, ‘한청’과 ‘우리’가 봄볕 아래서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다.
노란 산수유가 물들인 띠띠미마을, 두동마을
봉성면 동양리에 있는 띠띠미마을은 뒷듬(뒤에 있는 골짜기)에서 유래됐다. 뒷마을, 뒷뜨미가 세월이 흐르면서 띠띠미마을이 됐다. 정식명칭은 두동(杜洞)마을이다. 산으로 꽉 막힌 마을이라 막을 두(杜)자를 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두곡 홍우정이 참담한 마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봉화의 깊은 산골 마을로 내려왔다. ‘벼슬하기 위해 공부하지 말라, 산수유만 잘 가꿔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니 공연한 세상일에 욕심을 두지 말고 휘말리지 말라’는 뜻을 담아 마을을 일궜다.
4월이면 봄의 한가운데서 지천으로 널린 산수유나무가 꽃을 피운다. 마을이 온통 노란색으로 물든다.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내성천 가에는 400년을 살아온 시조목 두 그루가 구름처럼 부풀어 무성한 꽃을 피운다. 옥류암, 성경재, 홍의상 가옥 같은 고즈넉한 고택이 남아 있는 띠띠미마을에 산수유꽃이 만발하면 노란 꽃들의 향연 속에서 ‘신춘 시낭송회’가 열린다.
정자와 고택의 고장 봉화
분천역에서 춘양역으로 나가면 정자와 고택의 고장 봉화의 매력에 빠진다. 봉화 만산고택은 조선 말기의 문신인 만산 강용이 1878년에 지은 집으로 긴 행랑채와 너른 사랑채, 서재와 별채, 안채를 거느린 빼어난 건축물이다. 문인과 우국지사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한 의양리 권진사댁, 충재 권벌의 후손이 지은 봉화 한수정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춘양역에서 봉화읍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안동 권씨 집성촌 달실마을에 닿는다. 황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 명당으로, 조선 중기의 충신이자 대학자였던 충재 권벌이 일가를 이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돼 오늘에 이른 한옥마을이다.
종가에서는 왕이 명한 불천위 제사를 지금까지 지내는데, 충재 선생의 유품을 모아 정리한 충재박물관에는 불천위 제사의 내용이 자세히 정리돼 있다. 충재 선생이 지은 청암정과 그 아들이 지은 석천정사의 계곡은 달실마을이 품은 보석이다.
국보 제201호로 지정된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도 찾아보자. 호고산 자락의 바위에 새겨진 부조 형식 여래좌상으로,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지림사는 의상대사가 머물며 축서사 창건의 계시를 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림사에서 약 10㎞ 거리에 있는 축서사도 함께 돌아보면 좋다.
재산면 갈산리에서 명호면 삼동리까지 이어진 갈산구곡의 구곡(九曲)은 ‘아홉 물굽이’라는 뜻이다. 물줄기가 굽이굽이 돌아가는 계곡에서 경치 좋은 아홉 곳을 선정했다. 중국의 주자(朱子)가 복건성 무이산(武夷山)의 아름다운 계곡 아홉 곳을 정해 이름 지은 뒤 오곡에 ‘무이정사’를 지어 후학을 가르친 데서 유래했다.
산과 물이 빼어난 영남지역에는 옥산구곡, 안동 도산구곡, 봉화춘양구곡 등 구곡문화가 활발했다. 갈산구곡은 갈천 김희주가 정한 구곡으로 다른 구곡처럼 경치가 뛰어난 곳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일곡(一曲) 합강은 재산천과 낙동강이 합쳐진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강을 넘어 다니며 장사했으나 지금은 오가는 사람 없이 빈 배만 강 위에 떠 있다. 이곡(二曲)은 하천에 돌이 많아 돌로 담을 쌓았는데, 그 수가 50여 개가 넘을 정도로 많아 쉰담이라고 불렀다. 삼곡, 토골에는 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 이곳에서 만든 옹기는 전국으로 팔릴 만큼 이름났다고 한다.
삼곡과 사곡 사이에 있는 용소목이는 용가마처럼 생긴 둥근 못에 물이 빙글빙글 돌다가 흐르는 모양이다.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명주실 두 타래를 넣어도 끝이 닿지 않을 만큼 깊고,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찬물내기라 불리는 사곡에는 17가구가 모여 살면서 식수로 이용한 샘이 있었는데, 이 샘물은 아주 차갑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 강변에 만발한 진달래 꽃잎이 물에 떠내려가며 꽃냄새를 풍긴다고 해 골내골이라고 부르는 오곡과 육곡, 칠곡, 팔곡, 구곡까지 갈산천 구곡길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솔 향기 그윽한 봉화 솔숲갈래길
봉화읍에서 네 갈래로 갈라지는 솔숲갈래길은 봉화 읍내를 흐르는 내성천 산책길, 석천계곡에서 닭실마을로 가는 옛길, 닭실마을 안에 있는 토담길로 이어진다.
길은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다. 선비의 기상처럼 쭉쭉 뻗어 있는 금강송 숲길에서 솔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 너럭바위 사이로 흐르는 석천계곡과 그 앞에 별장처럼 세워진 석천정사의 풍경은 마치 산수화를 옮겨놓은 듯하다. 계곡에서 난 오솔길에는 야생화가 손짓한다.
길을 따라 나오면 넓은 논밭이 펼쳐진다. 푸른 논 너머로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지세의 전통마을, 닭실마을에 고즈넉한 고택이 모여 있다. 오랜 세월의 더께를 입은 정자, 청암정은 멋스럽다. 계곡과 들판을 따라 역사와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솔숲갈래길은 운치 있다.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서 관창리까지 난 예던길은 낙동강을 따라 청량산과 안동 도산을 잇는다. ‘녀던길’이라고 불렸다. ‘녀던’은 ‘가던, 다니던’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퇴계 이황이 13세부터 숙부 이우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청량산 오산당(지금의 청량정사)까지 걸었던 길이다.
노년에는 퇴계의 종택이 있던 곳에서 청량산까지 50리 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를 존경하는 후학들이 먼 길을 찾아와 옛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거닐었다. 그런 이유로 이 길에는 바위 곳곳에 퇴계의 시가 새겨져 있다. 그가 남긴 시를 읊조리며 수려한 풍경 속을 걷는 사색의 길은 고즈넉하다.
/글·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