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연보라·분홍빛 은은하게 물들어진 6월이 가장 아름다운 ‘광주 올봄식물원‘ 60만㎡ ‘고성 그레이스 정원‘의 안방마님 장맛비 그치고 꽃잎 짙어질때가 더 청량 여름 제주도 어딜가나 감성가득 수국길
프랑스의 시인인 제라드 드 네르발(Gerard de Nerval)은 ‘모든 꽃은 자연에서 피어나는 영혼’이라고 했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꽃을 좋아하는 것은 자연의 영혼과 교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좋아하는 꽃도 유행을 탄다. 최근까지 가장 인기 있었던 꽃은 유채꽃이었다. 아직도 가을철에는 메밀꽃이 대세고 겨울철에는 동백꽃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꽃은 아니지만 불과 5년 전만해도 전국이 핑크 뮬리(분홍억새)가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2019년 국립생태원에서 핑크 뮬리가 생태계를 교란하는 식물로 지정한 이후 빠르게 퇴출됐다.
핑크 뮬리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이 바로 수국이다. 수국은 한자로 ‘물 수(水)’에 ‘국화 국(菊)’ 자를 쓴다. 이름에 걸맞게 물을 좋아하고 국화처럼 넉넉한 꽃을 피운다.
지금은 수국의 계절. 한반도 곳곳에 수국이 눈부시게 꽃을 피웠다. 이번 주말에는 탐스럽게 핀 수국을 따라 꽃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 수국마니아들이 즐겨찾는 비밀스러운 공간 율봄식물원
여름이 막 시작되려는 6월, 계절의 색을 가장 먼저 입는 꽃은 단연 수국이다.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율봄식물원은 지금, 연보라와 하늘빛, 분홍으로 번지는 수국으로 정원을 가득 채운다.
평범한 식물원도, 단순한 공원도 아니다. 농업과 예술, 자연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낸 이곳은 이름처럼 조용한 ‘봄’의 결을 닮았다.
율봄식물원이 주는 첫인상은 ‘단정함’이다. 군더더기 없이 구성된 동선, 계절에 맞춰 철저히 계획된 식재, 그리고 곳곳에 배치된 감각적인 오브제들이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진짜 매력은 꽃의 색감이 아니라, 공간에 흐르는 여백의 미에 있다.
수국이 피는 6월은 이 정원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계절이다. 정돈된 조경 사이로 피어난 수국은 마치 수채화의 번짐처럼 은은하게 풍경을 물들인다.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심에서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조용히 걷기만 하는 이도, 모두 각자의 속도로 이 정원을 소비한다.
율봄식물원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선다. ‘농촌예술테마농원’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곳은 농업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다. 자연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계절 농산물을 활용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땅을 만지고 생명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에게는 생태 교육의 장이 되고, 어른들에게는 쉼의 공간이 되어준다.
무엇보다 율봄식물원은 아직 SNS에서 대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덕분에 방문객의 발길도 북적이지 않아, 자연과 조용히 마주할 수 있다.
△ 수십만 그루의 수국이 맞아주는 그레이스 정원
경남 고성 백암산 뒤편에도 비밀의 정원이 있다. 지난해 문을 연 그레이스 정원은 수국을 테마로 한 59만5000여㎡규모의 민간정원이다. 메타세쿼이아가 마치 군인처럼 도열한 입구부터 보랏빛 수국이 화사한 꽃송이를 자랑한다. 올해는 일찍 찾아온 더위 탓인지 벌써부터 정원 곳곳에서 수국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돌담을 따라 올라가니 구릉과 언덕에도 각양각색의 수국이 만발하다. 숲 한가운데는 붉은 벽돌로 지은 작은 교회도 있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공연장도 있다.
그레이스 정원은 경남 창원의 마금산 온천에서 온천장을 운영하는 조행연(여·76) 씨가 14년에 걸쳐 가꿔온 정원이다. 그레이스 정원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눈치 챘겠지만 실상 이 정원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조 씨가 선교센터를 지을 목적으로 만든 곳이다.
정원의 시작은 자신이 운영하는 온천장에 있던 메타세콰이어를 옮겨 심는 것이었다. 길 양옆으로 정갈하게 줄지어 메타세콰이어를 심은 뒤 숲 한가운데 붉은 벽돌로 교회부터 지었다. 그때부터 정원과 식물에 대해 공부했다. 원예와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유튜브를 뒤졌다. 하나하나 공부해가면서 정원 만들기를 진두지휘했다. 10여 년이 넘게 정원을 꾸미는 과정에서 조 씨는 자료를 뒤지고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조언을 얻어 식물과 관련한 실전 지식을 익혔다.
그레이스 정원은 전문가들이 본다면 어딘가 허술해 보일수도 있지만 허세나 과장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꽃의 생태적 특성보다는 꽃이 주는 위안을 생각하여 만든 정원이라 더 친근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메타세콰이어 길에 한쪽은 수국을 심고 반대쪽에는 경사진 물길을 놓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물소리를 배치한 조경이다.그레이스 정원의 수국은 청명한 날에도 좋지만 장맛비가 그치고 꽃과 잎의 색감이 짙어질 때 더 청량하다.
정원에는 수국만 있는 건 아니다. 정원 위쪽의 경사지에는 자작나무와 해국을 심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햇살은 더 농밀해지고 수국을 따라가는 길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 만가지 꽃과 향기로운 풀 만화방초
고성에는 또 한곳의 수국명소가 있다. ‘만 가지 꽃과 향기로운 풀들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만화방초(萬花芳草)가 그곳이다. 규모는 그레이스 정원이 더 크지만 수국정원을 먼저 조성한 곳은 만화방초다. 1997년 정종조 대표가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자 수국을 심기 시작하면서 조성한 정원이다. 만화방초의 전체 공간은 330,578㎡인데 이중 66,115㎡는 야생 녹차밭이며 야생식물도 700여종이나 서식하고 있다. 정원에는 200종이 넘는 다양한 품종의 수국이 제 색깔로 자라고 있다.
일부 수국정원이 수국을 보다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인공으로 색깔을 내는 경우가 있지만 만화방초는 자연을 최대한 살리자는 정 대표의 철학을 충실하게 구현했다.
포크레인 작업을 거의 하지 않고 길도 원래 짐승이 다니던 길을 그대로 활용했다. 만화방초는 오래 가꿔온 곳이니만큼 식생도 다양하고 공간도 다채롭다. 노랑어리연꽃이 만개한 작은 연못이 있는가 하면, 계곡 옆으로 울창한 편백나무와 수국이 어우러진 공간도 있다.
만화방초에서 수국이 가장 많이 핀 곳은 수국꽃길이다. 6월초인데도 탐스러운 수국이 지천으로 피었다. 정원 위쪽은 벽방산으로 이어지는데 정 대표는 전망대까지 수국을 심어 그야말로 수국천지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 한림공원, 혼인지, 김녕수국길 제주에 활짝 핀 수국
제주의 수국명소인 트로피칼한림공원은 1971년 협재해수욕장 인근 33만㎡의 광활한 황무지를 개간해 야자수와 관광 식물을 심으면서 조금씩 규모가 커져 9개의 테마를 담은 대규모 공원이 됐다. 아열대식물원, 야자수길, 산야초원, 협재·쌍용·황금굴, 제주석·분재원, 재암민속마을, 사파리조류원, 재암수석관, 연못정원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월마다 축제 테마를 달리해 연간 100만여 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여름에는 공원 내 이국적 풍취가 물씬 느껴지는 야자수 길을 따라가다 보면 꽃잎 하나가 수채화 붓 자국 모양을 닮은 수국이 한편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나볼 수 있다.
한림공원 수국동산에는 채도 높은 자색 수국들이 가득한데 1000여 그루의 수국과 산수국이 장관을 이룬다. 수국의 또 다른 이름 수구화(繡毬花)의 뜻처럼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절로 피어오른다.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혼인지도 수국 명소로 이름난 곳이다. 짙은 파란색 수국이 가득한 혼인지에는 설화가 전해진다. ‘제주’는 고려시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그 이전에는 ‘탐라’라 불리는 섬나라였다. 탐라국의 시조인 삼신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는 수렵 생활을 하다가 온평리 바닷가에 떠밀려온 오색찬란한 나무상자를 건져 올렸다.
상자 속에는 벽랑국의 세 공주와 오곡백과가 들어 있었다. 삼신인은 세 공주를 각자의 배필로 정하고 온평리 혼인지 연못에서 혼례를 올렸다. 나무상자에서 나온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고 오곡 씨앗을뿌려 농경 생활을 시작했다.
‘온화하고 평화롭다’라는 뜻의 온평리는 탐라국의 시작을 알린 곳으로이때부터 제주가 흥하게 됐다는 전설이다. 이런 이유로 온평리는 혼인지마을로 불리면서 전통혼례를 치르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혼인지에 수국 피는 계절이 오면 연못가에서 푸른 꽃들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돌담을 따라 삼공주추원사까지 이어진 꽃길은 공들여 장식한 버진로드처럼 화려하다.
서귀포에서 남원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의 잔잔한 풍경을 따라가다 닿게 되는 위미리에 여름이 오면 길가에서 푸른 꽃이 반긴다. 위미리 수국길의 꽃들은 여름의 아름다운 한 장면을 위해 인내하다가 길가에서짧고 굵게 피어난다.
마을은 고즈넉한 포구를 품고 있다. 위미항 방파제에 핀 한 다발의 수국은 엽서 한장에 담긴 그림 같다. 화려하게 가꿔 놓은 수국 명소보다 조금 쓸쓸하지만, 항구를 포근하게 감싼 서정적인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제주의 속살을 마주한 듯 마음이 따뜻해진다.
/최병일 기자 skycb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