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키운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낳으면 그냥 자랄 것 같은 아니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 것이 곧 자식이다.
남보다 뛰어났으면 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크게 문제없이 자라주면 좋겠는데, 어디서 어떻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아이의 문제 행동을 맞닥뜨리게 되면 더욱 당황스럽고 속상하기만 한 게 부모의 마음이다. 몇 년 전까지 한참 유행했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이렇게 어렵기만 한 육아를 도와주고자 만들어진 육아 코치 프로그램이었다. 생각보다 도움을 원하는 부모가 많았기에 사회적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근래 인기리에 방영 중인 ‘금쪽같은 내 새끼’도 비슷한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TV프로가 인기가 높다는 것은 소중한 내 자식이 행복하게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 마음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이기에 내가 달라져서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권문해(權文海·1534~1591)는 1587년(선조20) 8월 28일의 일기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당시 그는 대구부사에 재직 중이었는데, 마침 경남 안음에서 열린 감시도회(監試都會)의 시험관으로 출장 갔다가 서둘러 돌아온 길이었다. 동생이 부종(浮腫)을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동생뿐만 아니라 어린 여식까지 아픈 상태였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때 대구부(大邱府)에 도착하였다. 달아(達兒)가 머리 위에 종기가 나서 약을 발랐다. 딱지가 앉은 뒤에는 종기가 아래로 내려와 목에 부기가 생겨 목과 얼굴이 분간되지 않았다. 치료가 어려운 지경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침으로 종기를 터트려 피를 낸 뒤에야 부기가 조금 가라앉았으니 다시 살길이 보이는 듯했다.”-권문해의 ‘초간일기’ 1587년(선조20, 정해년) 8월 28일 일기 중에서
권문해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식이 없어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30년을 함께 살았던 첫 번째 부인 현풍곽씨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내의 죽음에 자식 없는 서글픔까지 겹쳐 한참 동안을 슬퍼하고 또 슬퍼했다. 권문해는 이러한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 ‘죽은 아내 숙인 곽씨에 대한 만사(挽亡室淑人郭氏)’를 지었고, 1582년 10월 20일의 일기에 이 글이 온전하게 기록되어 있다. 약 2년 후 함양박씨와 혼인했는데, 권문해의 나이는 51세였다. 일기에 보이는 달아는 두 번째 부인 함양박씨와 혼인한 직후 얻은 딸로 추측되며, 이 당시 겨우 2~3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딸아이였다. 작은 머리에 난 종기가 목으로 내려와 목과 얼굴이 분간되지 않은 모습을 지켜보던 권문해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치료가 어려운 게 눈에도 확연히 보이지만, 종기를 터뜨려 부기가 다소 가라앉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 부모의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날부터 달아의 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권문해는 아이의 종기가 가라앉아 살 수 있다 생각하고 안심했던 것 같다. 일기에서 달아가 다시 등장한 것은 10월 7일로 20일쯤 지났을 때였다. 저녁부터 기운이 고르지 않더니 밤에는 통증이 그치지 않는다고 적었다. 짧고 간략한 기록이지만, 그 속에 울며 보채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다음 날의 일기에서는 공무로 바깥에 나온 일과 함께 달아의 증세를 중간중간 섞어 적었다. 감기 정도의 가볍고 우연한 병증이라 생각했는데, 이날 저녁까지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들었다고 했다. 다음 날에는 달아의 병이 수그러지지 않아 아침 일찍 복귀했다고만 기록했다. 다음 날은 아예 출근하지 않고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이의 증세가 여전한 것을 보며 혹시 관아 북쪽 담장 내에 토우(土偶)를 만들어 묻은 것이 동티난 게 아닐까 의심하고 또 걱정했다. 천연두인지 모르겠다면서도 확실하지 않다고 적고 있으니, 이것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다.
달아가 아픈 것은 결국 천연두때문이었다. 10월 11일, “병든 아이에게 역신(疫神)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해 얼굴 위에는 마치 좁쌀을 흩뿌려 놓은 듯하였고, 온몸에는 마치 물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고 기록했다. 더 이상의 일기는 없었지만, 이날 달아는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날 권문해는 달아를 병장기를 보관하는 곳에 옮겨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그 이유를 다시 다음 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역병으로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혹 깨어나는 경우도 있기에 종을 시켜 계속해서 열어보도록 하였으나 가망 없는 일이다”라고. 죽은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 부정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달아가 아프기 시작한 7일부터 권문해는 온통 달아 생각뿐이었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일까. 권문해는 이후 며칠간 출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88년 10월 12일의 일기에서 “이날은 달아가 역병으로 죽은 날이다. 종일 출근하지 않았다. 온 집안이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채소만 먹고 고기는 먹지 않았다”라고 기록하며 달아를 그리워했다. 이것은 158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성장하면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소통과 공감이 쉽지 않아진다. 이 때문에 숱한 갈등에 부딪치며 부모도 자식도 속상한 날을 보낼 때가 많다. 건강하게만 자라주는 것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는 것들이 사실 나에게 주어진 특별한 행복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