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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빌며 새해를

조낭희 수필가
등록일 2015-01-02 02:01 게재일 2015-01-02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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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선본사의 갓바위
▲ 조낭희 수필가

잔설이 남아 있는 숲을 헤치고 염불 소리가 먼저 마중을 나온다. 외롭지 않은 새벽 산길이다. 새벽잠이 많아 비장한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선뜻 동행해 준 지인의 고마움도 한몫을 했다. 초롱초롱한 가로등 불빛을 밟으며 우리는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풀어내며 돌계단을 오른다.

숨이 차다. 난간을 잡고 걸음을 멈추자 뜨거운 입김이 찬 공기를 만나 하얗게 변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불변토록 존재할 이 우주 속에서 미약하기만 한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새벽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가? 무엇이든 하나의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갓바위를 찾아서.

수시로 변하는 생각과 상을 좇아 허걱대며 살아왔다. 그럴수록 뒤안길은 허전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때면 통과의례처럼 참다운 모습에 눈을 뜨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믿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과 홀로 봇짐을 지고 오르는 불자들의 발걸음에는 단련된 익숙함이 있다. 편안해 보인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마음을 밝혀 주는 고요한 즐거움을 읽는다.

어쩌면 이 우주조차 무상한 먼지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를 찾아 헤매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염원하는 의식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생긴,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본능과도 같은 행위이리라.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

염불 소리는 푸르게 눈을 뜨는 새벽을 적시고 얼어붙은 골짜기를 녹인다. 모처럼 맞는 안온함이다. 어린 시절의 새벽은 언제나 예배당의 종소리가 뎅그랑거리며 열어 주었다. 낯선 이국의 새벽을 열던 이슬람 종교의식, 아잔 소리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제사 때 축문 읽는 소리조차도 참다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했다. 나는 이 염불 소리가 좋아 갓바위를 찾을 때도 있다.

팔공산 관봉에 위치한 갓바위의 정식 명칭은 관봉석조여래좌상이다. 약사여래불은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에서 구원해 주는 부처님으로 통일신라 시대 때 하나의 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답답한 법당을 벗어나 해발 850m의 정상에 정좌한 부처님은 근엄하다. 하나의 소원은 들어준다는 소문 때문인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여느 부처님과는 달리 평평한 돌관을 쓰고 멀리 동쪽을 응시하고 있다. 어려운 학문과 졸업의 성취감을 상징하는 학사모가 연상되어서인지 수험생을 둔 학부모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고행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이른 부처님의 돌관을 어찌 학사모에 비하랴만 시대에 맞는 인간미가 느껴져 왠지 친근해 보인다. 푸른 실루엣으로 물결치는 산야, 보석처럼 반짝이는 도시의 네온사인, 산 위를 밝히는 촛불의 일렁임까지 부처님은 말없이 굽어본다.

나도 양초를 준비했다. 이름과 소원을 초에 적은 후 불을 붙이라고 했다. 소원은 희망을 주는 따뜻한 말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작은 바람들은 있었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빌어본 적은 없었다. 갑자기 욕심이 생긴다. 가족의 건강, 남편의 사업, 아이들의 안정된 미래, 아니 좋은 글도 쓰고 싶다. 짧은 순간 소원거리가 마구마구 밀려든다.

이태 전 딸아이가 취업시험을 치른 후, 갓바위 부처님께 다녀왔다고 했다. 불자도 아니고 산을 좋아하는 아이도 아닌지라 그 간절함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 그토록 원하던 곳에 입사한 햇병아리 직원은 밀려드는 업무와 야근으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청원을 위한 기도는 우리를 더 큰 탐욕의 세계로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가.

▲ 팔공산 선본사의 갓바위
▲ 팔공산 선본사의 갓바위

잠시 고민하다 제대로 마음을 닦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적었다. 감정과 욕심에 휘말려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놓치며 살고 싶지는 않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즉흥적인 내게 이것은 절실한 문제다. 정돈되어 있다고 믿었던 마음은 자주 통제력을 잃고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스스로를 들볶기도 한다. 대부분 상대적 열등감이나 자만심에서 비롯된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생각 속에서 나는 늘 자유롭지 못했다. 속된 욕심이 많아서일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닦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데 어쩌면 이 소원조차 욕심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욕심 아닌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왕이면 세계 평화나 남북통일, 좀 더 거룩하고 멋진 소원을 적을 걸 그랬다. 저 많은 초는 무슨 소원을 담고 타오르고 있을까? 소원은 삶을 희망적이고 견고하게 만든다. 그래서 소원이 있다는 것은 삶의 안전장치가 있음을 의미한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내가 딛고 서 있는 시공간이 더욱 진지하게 다가온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만물이 깨어난다. 저 아래 도시도 부산하게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근엄하던 부처님의 얼굴에도 생기가 돈다. 돌이끼가 눈물자국처럼 보이기도 하고 짓궂은 미소를 살짝 보내는 것도 같다. 염불 소리는 더 힘차고 낭랑하다. 바람 앞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촛불들, 그 안에 내 소원도 힘차게 타고 있다. 부처님의 공덕이든 하느님의 은혜이든, 세상의 모든 소원이 봄날의 꽃잎처럼 피어올랐으면 좋겠다. 겸허하게 자세를 낮추는 사람들, 그 숙연한 물결 속에 끼어 나도 백팔 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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