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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빈로에서 - ‘아내의 웬수’ 아버지여 화이팅

등록일 2005-02-18 17:59 게재일 200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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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전 집사람이 좁은 전세아파트에 너덧 포대 됨직한 밤을 들고 와 손이 부르터도록 깎고 있었다.


온 집안에 밤 껍질이 지저분하고 칼자루를 쥐고 밤낮없이 밤 껍질을 까고 있는 아내의 손엔 곳곳에 물집이 생겨 “무슨 청승이냐”며 그만두길 만류한 적이 있었다.


아내 왈, “무료하던 차에 애들 과자값도 벌겸 밤 깎는 재미가 솔솔하다”며 “한나절 걸려 한 포대의 밤을 다 깎아봐야 1천원밖에 벌지 못하지만 밤 깎는 시간동안 노동의 소중함을 알고 절약해야 한다는 지혜를 깨우치고 있다”며 즐거워했다.


내 아내는 나를 웬수라고 부른다. 내 아내는 드라마나 영화속 결혼생활을 상상하며 나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난 소주한잔에 삼겹살 한처럼 먹으며 내 아내에게 벌그스레해진 얼굴과 어눌한 말투로 사랑한다고 하는 멋대가리 없는 남편이다.


TV에서 젊은 배우나 가수가 나오면 아내는 가끔 한숨을 내쉬며 “나도 저럴때가 있었는데” 한마디 내뱉고는 나를 무섭게 노려보곤 한다.


그런데 난 그런 내 아내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딸아이와 싸우는 내 아내의 고음의 목소리도 감미롭고 걸레질을 하다말곤 TV앞에 멈춰 젊은 여자 아이들을 보며 투덜거렸다가 홱 돌아서 나를 째려보는 그 눈빛이 귀여워 어쩔줄을 모르겠다.


“난 영원히, 다음생에서도 아내의 웬수이고 싶다”


국내 한 생명보험사가 3월 3일을 ‘아내의 날’로 정하고 지난해 첫 시행한 ‘아내사랑 글쓰기 대회’에서 1등을 한 어느 남편의 글이다.


이 생명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3월 3일을 ‘아내의 날’로 정해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의 카드 80만부와 ‘아내사랑 10계명’이 담긴 안내장 150만부를 제작, 무료로 배포하고 홈페이지를 통해 퀴즈응모와 ‘아내사랑 글쓰기’ 등의 이벤트를 벌인다.


부부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고 바람직한 가족상을 만들자는 것이 이 행사의 취지라고 한다.


이쯤되면 우리의 남편들은 “왜 남편의 날을 없는가”라고 투덜댈지 모른다.


‘아버지의 명찰’을 달고 살고 있는 우리의 남편들, ‘아버지 노릇’ 하기가 날이 갈수록 더욱 힘들어지는 세상이다.


아버지는 우선 돈을 잘 벌어야 하고 전날 제 아무리 술에 떡이 되어 귀가했어도 이튿날 아침엔 용수철처럼 일어나 다시금 출근을 하는, 일종의 슈퍼맨이 되어야만 한다.


이 사회의 패러다임(?) 또한 아버지는 그저 돈이나 벌어오는 기계쯤으로 치부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일까, 미국에서는 ‘아버지의 날’이 있다.


이 날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소노라 스마트 도드(Sonora Smart Dodd) 부인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홀로 여섯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지켜 보며 제안한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1960년에 6월의 3째주 일요일을 ‘아버지의날’로 지정했다.


‘바바(父 아래 巴, 아버지)’의 발음과 숫자 8(바)의 발음이 같아 8이 두개가 겹치는 8월 8일을 아버지의 날로 정하고 있는 대만의 아버지들은 실직의 두려움 속에서도 자녀들에게 주는 용돈의 절반도 쓰지 않는다는 조사가 나왔다.


금융권의 대규모 인력감축과 업종을 불문한 상시 구조조정의 살얼음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남편과 아버지들 또한 자식들에게 한푼의 용돈이라도 더 주기 위해 자신의 용돈을 절약하고 있는 것은 대만의 아버지들과 다를 바 없을 게다.


그런데 어버이날이 있긴 하지만 정작 삼사십대 부모들로서는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빼빼로데이, 심지어 삼겹살데이 등 ‘데이’가 넘쳐나는 세상에 자식들만의 잔치인 그 많은 데이를 챙겨주기 위해 또 등골이 휜다.


갈수록 살기가 각박해지는 요즘, 우리 가정의 버팀목으로서 묵묵히 자리하고 있는 우리의 아내와 남편들이여, 그대들이 있음으로해서 가정이 있고 그 가정이 우리사회를 굳건히 떠받치는 동량이 되고 있으니 비록 우리들만의 ‘데이’가 없다고 실망하지 말고 나날이 ‘아내의 날, 남편의 날’처럼 화이팅을 외쳐주자.


<이창형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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