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건축은 건축 이상을 의미한다. 미술관은 미술을 담는 공간이지만 미술관 건축은 그 자체로도 예술이다. 어떤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지, 어떤 전시를 기획하는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미술관의 첫 인상은 미술관 건축에서 비롯된다. 마찬가지로 미술관에 대한 기억에 있어서도 다름 아닌 건축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파리의 루브르하면 유리 피라미드,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 하면 나선형 계단, 파리 퐁피두센터하면 외부로 노출된 설비시설이 떠오를 정도로 미술관의 기억은 곧 미술관 건축에 대한 기억이다.예술성, 기능성, 상징성, 공공성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북쪽 벽면에는 ‘성 삼위일체(The Holy Trinity)’를 주제로 하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를 그린 화가는 15세기 초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마사초(Masaccio)라는 사람인데 스물 여섯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지만 실력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마사초가 ‘성 삼위일체’를 그린 것은 대략 1426년에서 1428년 사이로 피렌체의 노련하고 쟁쟁한 미술가들과의 경쟁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던 것 같다.‘성 삼위일체’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본교
이탈리아 라벤나에는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재위 488∼526) 통치시절인 5세기말에서 6세기 초에 지어진 ‘아리안 세례당(Arian Baptistery)’이 있다. 세례당 천장은 의례 이 시기 교회들이 그런 것처럼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색 입힌 작은 돌이나 유리조각을 배열해 이미지를 만드는 모자이크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빛을 반사시켜 실내공간에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천장 전체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반원형의 둥근 천장 가운데 부분에 크기가 작은 또 다른 원형 하나가 더 들어간 구조를 보인다. 가장 중심의
그림은 보는 것에서 시작해 그리는 것으로 종결된다. 화가는 끊임없이 보는 사람이다. 보는 것은 시각과 시선의 문제이며, 생각과 관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일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화가의 시선에 따라 그림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 그림의 매력이다.화가의 시선에 따라 동일한 대상도 달리 보여진다. 어떤 화가들은 바깥 세계를 내다본다. 또 어떤 화가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 빈센트 반 고흐가 내면을 들여다본 화가라면 데이비드 호크니는 밖을 내다보는 화가
고딕의 대성당 건축은 서양 중세미술의 결정체라 부르더라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중세가 추구했던 정신적 가치가 대성당 건축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완성된 것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형태와 기술이 한 지점에서 만나 이루어낸 것이 고딕의 대성당 건축이다.중세 고딕의 대성당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12세기 중엽 처음 등장한 고딕양식이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파리의 노트르담이 지어질 즈음 고딕만의 안정된 건축 언어를 찾을 수 있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건축의 초석을
12세기 중반 출현한 고딕건축은 유기적 연결성이라 새로운 접근법으로 중세 건축을 혁신했다.천장에 설치된 교차형 늑재궁륭은 하중을 안정적으로 분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촘촘하게 맞물려 있는 늑재들은 다발을 이루며 벽을 타고 내려와 기둥으로 연결된다. 건물 외벽에 튼튼한 부벽을 설치해 팽창하는 힘을 지탱했고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플라잉 버트레스’ 공중부벽을 설치했다.그물처럼 견고하게 엮인 늑재와 외부에서 든든하게 힘을 상쇄시키는 공중부벽 덕분에 두꺼운 벽이나 육중한 기둥이 불필요해 졌다. 고딕 건축가들은 오히려 벽의 넓은 면을
서양미술사에서 통용되는 몇몇 용어들은 특정 미술을 낮추어 부르기 위해 악의적으로 고안되었다. 르네상스 끝 무렵 잠깐 등장한 매너리즘,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바로크,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준 인상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중세에 나타난 고딕의 경우도 그렇다. 고딕(Gothic)이라는 단어 안에는 벌써 고트족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 야만족의 미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물론 이것은 미술사적으로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이다. 고대를 모범으로 한 자신들의 업적에 가치를 더할 의도로 앞
중세미술에서 조각의 발달 과정을 살필 때 우선 눈여겨 보아야하는 부분은 건축과 조각의 관계이다. 중세시대에는 아직 ‘순수미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순수미술이라는 말에는 유용한 쓰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작품에 내재된 아름다움 자체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중세미술은 ‘순수’하지 않다. 중세미술은 종교적 목적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었고 물질로 된 미술품 자체가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았다. 미술품이 가리키는 성스러운 대상, 미술품이 상징하는 종교적 가치가 아름다웠던 것이다. 중세미술 중심에는
유럽의 도시에서는 어렵잖게 중세에 지어진 교회건축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건축 곳곳이 조각으로 장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길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파사드 벽면 위에도 고개를 살짝 들어 보기에 적당한 높이에도 성인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기둥처럼 서 있다. 가장 의미심장한 조각은 팀파늄(Tympagnum)에 들어가 있다. 팀파늄은 출입문 바로 상단 반원형의 너른 면을 가리키는데 주로 이곳의 조각은 부조 형식으로 나타난다. 빈도수로 보자면 영광의 그리스도나 심판자 그리스도 혹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옥좌
11세기 초 출현한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은 고대 로마 건축을 닮았다. 비록 지금은 폐허가 되어 옛적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클뤼니에 세워진 수도원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위용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우선 로마네스크 교회는 크고 높고 우람하다. 로마네스크를 뒤따르는 고딕은 더 높고 더 웅장하지만 육중하거나 우람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돌의 무게를 극복하고 시각적으로 상승하는 듯 보인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은 건축을 올린 방식과 꾸미는 장식이 달랐다.고딕이 공학적 기술력으로 높이를 추구할
10세기에서 11세기로 넘어갈 무렵 중세 유럽 사회에는 봉건제도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봉건제도는 토지를 매개로 주군과 봉신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토대로 형성된 사회제도이다. 봉건제는 넓은 땅을 소유했던 대지주들의 권력을 강화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교회와 수도원의 세속적 영향력 또한 강화시켰다. 중세의 성직자들에게는 많은 사회적 특혜가 주어졌다. 이들은 지식을 독점했고 세금이나 노역을 면제 받았다. 교회에 대한 이 같은 특권은 종교적 기강 약화를 비롯해 여러 부작용들을 야기했다. 결정적으로 교회의 세속화
476년 게르만의 침략으로 서로마제국이 패망한 후 유럽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사회는 급격히 변했고 사람들은 비참한 마음을 견뎌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새로운 천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종말과 심판이라는 세기말적 공포에 휩싸였다. 새천년이 밝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의 마지막도 심판도 일어나지 않았다. 종말의 공포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안도했다. 신의 분노가 진정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마을들은 서로 경쟁하듯 낡은 교회를 단장하거나 크고 웅장한 교회를 새로 짓기 시작한다
중세미술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수도원이라는 공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수도원은 오로지 종교적 삶에 헌신하기 위해 속세와 거리를 두고 세워진 신앙 공동체이다. 중세시대의 수도원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목적을 위해 지어졌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했다.중세시대에는 보편 교육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이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고위 계층에 제한된 일종의 특권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지식이라는 것은 일상이 이루어지는 좁은 영역 안에서 경험적으로 얻어진 것에 불과했다.이러한 중세시대의 상
800년 성탄절 날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를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초청해 왕관을 씌워주었다. 서양의 역사에서 이 사건에는 여러 상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황이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교황은 게르만의 일파인 프랑크의 왕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고 강력한 힘을 지녔던 세속 군주 카롤루스는 교황을 지켜주었다. 카롤루스가 치세하는 동안 프랑크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문화와 학문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던 그의 정책에 힘입어 혼란의 중세 유럽은 첫 번째 르네상스를 맞이했고 이 때를 가리켜 ‘카롤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c.690-741)은 약해진 왕권을 틈타 나라의 실권을 손에 넣으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카를 마르텔의 권력을 물려받은 것은 둘째 아들 피핀이다. 키가 작아 ‘단신 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용맹하고 지혜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카를 마르텔이 카롤링거 왕조의 문을 열었다면 피핀은 카롤링거 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754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자리한 가운데 그를 위해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768년 피핀이 쉰 넷으로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이 왕좌에 올랐는데 그
독일의 고도 아헨(Aachen)은 프랑크 왕국의 위대한 왕 샤를마뉴(747∼814)가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다. 도시의 중심에는 왕의 거처와 통치를 위한 부속 건물들이 지어졌지만 지금까지 옛 궁터에 남아 있는 것은 왕실교회 밖에 없다. 아헨 대성당이라고 불리는 이 교회는 796년 경 지어지기 시작해 798년 무렵 완성되었고 805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축성되었다.아헨 대성당은 중세 교회건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직육면체의 바실리카가 아닌 비잔틴의 중앙집중식 구조로 지어졌다. 건축물의 중심에는 8각형 돔이 올라가 있고 그것
서양미술사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지역에서 나타난 미술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지금의 서유럽 각 나라들은 국경을 통해 서로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술사 전개에 있어서도 나라 간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중세미술을 살필 때는 역사를 바라보는 다른 틀이 필요하다.중세미술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긴 시기를 차지한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게르만의 침입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 중세가 시작되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1400년까지 이어졌다
서양의 중세하면 ‘암흑’이라는 수식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만약 중세가 ‘암흑’이라면 인류의 역사에서 암흑이 아니었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여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명암은 있었고, 혼란과 혼동의 시기가 있었으며, 학문적 번영과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시기도 있었다.천년 동안 지속된 중세에 암흑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것은 누구인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람들이다. 역사학자 하위징아가 ‘가을’이라 일컬은 중세의 끝단 14세기와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라고 불리게 될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다. 르네상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발효되면서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허용했다. 기독교도들은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로마의 공공건물 구조를 모방해 교회를 지었고 벽면을 그림으로 장식했다.초기기독교 시기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벽화기법은 모자이크였다. 모자이크는 아주 오래된 기법으로 작은 크기의 돌 조각이나 유리에 색을 입히고 그것을 배열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다. 섬세한 묘사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관리가 용이하고 보존력이 탁월하며 무엇보다 빛을 받아 반짝이면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교회가 지어지고 그곳을 그림으로 장식해야 했
서양미술사는 서유럽지역에서 나타난 미술을 주로 다룬다. 시기적으로는 4세기 초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서양미술사가 시작된다. 유럽문화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와 로마시대 미술은 여러 시대에 걸쳐 서양미술의 모범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인용되기는 하지만 서양미술사의 직접적인 연구영역은 아니다.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내린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도들의 종교 활동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밀라노칙령 이전 기독교도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해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이나 가정에 숨어서 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