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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영남권 표심 사수 총력전···울산서 “배신주의 심판” 맹공

6·3 지방선거를 20여 일 앞두고 국민의힘 지도부가 영남권 표심 다지기에 나섰다. 부산과 대구에 이어 울산까지 사흘 연속 영남권을 훑는 광폭 행보를 이어가며 텃밭 민심을 하나로 묶고 선거 주도권을 탈환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12일에는 충남도당에 이어 경북도당 선대위 발대식 및 필승결의대회에 참석해 표심 굳히기를 이어갈 예정이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와 송언석 원내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는 11일 오후 울산에서 열린 ‘울산시당 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 및 후보자 공천장 수여식’에 총출동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두겸 울산시장 후보와 김태규 울산 남구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를 비롯해 김기현, 박성민, 서범수 의원 등 지역구 의원들이 대거 참석해 ‘원팀’ 분위기를 연출했다. 장 대표는 이 자리에서 김두겸 후보를 “아무리 어려워도 국민의힘과 함께 울산을 지켜온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는 한편, 민주당 김상욱 후보를 향해 날을 세웠다. 장 대표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세게 친다고 함께 타고 있던 배에 불 지르고 혼자 구명보트 타고 도망간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이 울산 시민을 책임질 수 있겠나. 자신을 뽑아준 시민을 배신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반드시 표로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국민의힘 지도부는 민주당이 추진 중인 이른바 ‘조작 수사·기소 특검법’(공소취소 특검법)을 이번 선거의 핵심 심판 대상으로 규정하며 맹공했다. 장 대표는 “국민을 무시하고 헌법을 짓밟는 세력을 이번 선거에서 반드시 심판해달라”며 “만약 대통령의 죄를 지우기 위해 공소취소 특검까지 통과된다면 이건 나라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정치권에서는 ‘방미 논란’ 등으로 한때 당내에서 소외됐던 장 대표의 보폭이 영남권을 중심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민주당의 특검법 발의가 전통적 보수 지지층의 위기감을 자극하며 결집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평가다. /고세리기자 ksr1@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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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맛과 곁들인 마음을 울린 그림책으로 호사 누리기

지금까지 세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내게서 출발한 책들이 지인과 친구들 손에 들렸다가 그들의 책꽂이에 잠시 머문다. 그 후의 시간은 분리수거장이거나 냄비 받침으로 쓰이다 헌책방 구석으로 숨을지 모른다. 내 책의 독자인 친구들과 부산 국제시장으로 쇼핑을 갔다. 쇼핑이 목적이지만 찬란한 봄날을 제대로 즐기려고 나선 소풍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오늘 일정은 맛집에서 점심, 쇼핑, 흑백 사진 찍기, 보수동 헌책방 둘러보기, 맛집에서 저녁 먹고 돌아오는 걸로 짰다. 오후 2시 사진관 예약만 확실한 약속일 뿐 다른 건 발에 닿는 대로 갈 예정이다. 포항 제일교회에서 만나 한 차로 출발했다. 일없이 외동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참새가 방앗간 들어가듯 들러 카푸치노 한 잔과 땅콩빵 한 봉지를 샀다. 차 안에서 나눠 먹으며 별 이야기 아닌데도 깔깔거렸다.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집을 나섰다는 이유만으로 즐거웠다. 국제시장은 이름답게 평일인데도 전 세계 사람으로 넘쳤다. 시장에 우뚝 솟은 주차타워에 차를 맡기고 곱낙전골로 유명한 ‘개미집’으로 향했다. 자주 가도 갈 때마다 헷갈리는 골목이다. 그래도 한 번에 찾아냈다. 친구들 입맛에 맞을까 조마조마했는데 맛있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화장실은 찾기 힘드니 개미집에서 해결하고 옷 가게로 향했다. 평생 얌전한 옷만 입은 친구들에게 새로운 스타일을 추천했다. S는 주저주저하다 내가 추천하는 원피스, 셔츠를 계산대에 올렸다. 하지만 색이 찐한 파란 치마는 용기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바지만 입는 G를 원피스 맛집으로 데려가서 하나를 골라 일단 입어보라고 떠밀었다. 갈아입고 나온 모습에 환호성을 질렀다. 너무 잘 어울렸다. 입은 그대로 사진관으로 향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자리한 흑백 사진을 찍어주는 곳이다. 오후 2시 예약인데 30분 전이라 헌책방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그림책을 가게 앞에 많이 내놓은 곳에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림책 큐레이션-학문서점 앞이다. 우리는 그림책 공부하며 만난 사이니까 자석처럼 끌렸던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주인장이 나오더니 자신의 그림책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하며 안으로 데려갔다. 15년 헌책방을 운영하다 보니 그림책을 많이 읽었고, 읽다 보니 아이들 책이라 생각했던 그림책이 어른을 위한 책이더라고 이야기보따리를 펼치려 했다. 잠시만요, 우리 사진 찍고 다시 올게요. 흑백 사진관으로 달려갔다. 새로 산 원피스에 셔츠랑 청재킷을 걸치고 우정 사진을 찍었다. 백 장 가까운 사진 중에 고르고 골라 인화를 맡기고 다시 학문서점으로 갔다. 차나 팥빙수 중에 하나를 주문하면 주인장이 손님에게 어울리는, 좋아할 만한 책을 7권 골라 준다고 했다. 우린 빙수와 차를 다 골랐다. 세 사람을 자세히 보더니 빙수의 얼음이 갈리고 차가 우려질 동안 고르고 고르더니 우리 테이블 가득 차렸다. 빙수가 녹는 줄도 모르고 각자 앞 그림책에 정신이 팔렸다. 녹기 전에 먹으라는 주인장의 재촉에 맛을 보았다. 옛날 빙수 맛이었다. 너무 달지도 싱겁지도 않은 추억의 맛이었다. 꽃차도 순하게 몸에 스몄다. 쇼핑하며 뜨거워진 몸이 릴렉스 되며 차분하게 그림책 안으로 들어갔다. 첫 책은 박준 시인의 시에 그림을 입힌 ‘우리는 안녕’이다. 내가 사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이라 주인장에게 들킨 것 같아 놀랐다. 또 한 권 내 마음을 울린 책은 ‘자린고비’, 영화 ‘만약에 우리’를 떠올리게 했다. 올 한 해 책을 사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무너뜨리게 했다. 여기 맛집이구나, 마음이 환해져서 돌아왔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보부상의 발자취와 ‘내성행상불망비’

십이령을 통해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며 상거래는 물론 문화와 정보 교류의 중추 역할을 했던 십이령 보부상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데 보다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봉화와 울진을 잇는 ‘십이령’은 열두 개의 고갯길을 뜻하며 ‘보부상길’이라고도 불린다. 봉화·영주 방향에서 동해안 울진으로 가는 핵심 통로였으며, 험준한 산세 탓에 당시 울진 사람들이 내륙으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이동이 매우 불편했기에, 한 번 길을 나서면 3일에서 길게는 7일 밤낮을 걸어야만 했다. 이처럼 멀고 험한 여정 탓에 고갯길 곳곳에는 주막이 번성했고,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보부상의 애환과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19세기 초 한양에서 봉화까지가 중심도로로 지정되면서 십이령은 봉화와 울진을 잇는 동서 연결의 주 통로가 됐다. 이때부터 보부상뿐만 아니라 원님과 관원, 일반인들까지 오가는 대로의 역할을 수행했다. 봉화 춘양장을 지나 모래재, 살피재, 막지고개, 곧은재, 꼬치비재를 넘으면 비로소 울진 땅에 접어든다. 이후 큰넓재, 한나무재, 저진터재, 너삼밭재, 새재, 바릿재, 쇠치재를 거쳐 흥부장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1880년 이전부터 이미 ‘십이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봉화 보부상 조직인 ‘내성행상단(봉화상무사)’은 기록에 따르면 1860년대부터 체계화된 활동을 시작했다. 1904년 일제강점기 보부상단 말살 정책으로 조직이 와해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이후 임의단체 형식으로 상행위를 지속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1960년대 초 도로가 개통되고 자동차 중심의 물류 체계가 잡히면서 십이령을 오가던 보부상들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울진 두천리 바릿재 입구에는 경북문화재자료 제310호로 지정된 ‘내성행상불망비’가 있다. 내성행상단의 접장 정한조와 반수 권재만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보부상들이 세운 철비로, 1880~189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장시를 엄격히 관리해 문란한 상행위를 바로잡고, 특히 산적이 득실거렸던 험난한 십이령을 안전하게 관리해 보부상들의 존경을 받았다. 반수 권재만은 1878년 최고 직책에 오른 인물로, 이후 봉화상무사의 공사원을 역임하며 조령 성황사에 현판 기록을 남기는 등 상단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두천리 주막촌은 한창 번창할 때 20여 개의 주막과 마방이 들어섰던 보부상들의 거점이었다. 십이령의 본격적인 시작점인 바릿재부터는 산세가 험해 산짐승의 공격이나 산적의 위협이 컸다. 이에 보부상들은 혼자 고개를 넘는 대신 두천리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동료를 기다렸고, 이튿날 새벽 30명에서 많게는 100여 명씩 집단을 이루어 고개를 넘었다. 이들은 울진 흥부장과 읍내장에서 소금과 어물을 구입하고, 봉화에서는 곡물, 인삼, 담배, 대마 등을 구입해 넘나들며 내륙과 해안을 잇는 정보 교류의 유일한 창구 역할을 했다. 객지를 떠돌던 보부상들에게 상단 조직은 곧 가족이었기에 엄격한 규율과 위계질서, 그리고 상부상조하는 직업윤리가 필수적이었다. 전국적으로 보부상 관련 유물과 문헌이 드문 상황에서, 십이령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비석과 문서들은 우리 상인 문화를 보여주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다. 보부상의 정체성이 서린 이 길과 전통문화에 대해 이제는 사회적인 보존 노력이 수반돼야 할 때다. /류중천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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