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마뉴의 아헨 대성당

독일의 아헨 대성당.
독일의 아헨 대성당.

독일의 고도 아헨(Aachen)은 프랑크 왕국의 위대한 왕 샤를마뉴(747∼814)가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다. 도시의 중심에는 왕의 거처와 통치를 위한 부속 건물들이 지어졌지만 지금까지 옛 궁터에 남아 있는 것은 왕실교회 밖에 없다. 아헨 대성당이라고 불리는 이 교회는 796년 경 지어지기 시작해 798년 무렵 완성되었고 805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축성되었다.

아헨 대성당은 중세 교회건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직육면체의 바실리카가 아닌 비잔틴의 중앙집중식 구조로 지어졌다. 건축물의 중심에는 8각형 돔이 올라가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은 16각형이다. 내부 역시 비잔틴 교회건축에서 관찰되는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아헨 대성당은 건축 구조나 장식 등에서 비잔틴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더욱이 이 교회와 거의 똑같이 생긴 교회가 이탈리아 북동부 라벤나에서 발견된다.

아헨 대성당과 닮아 있는 라벤나의 교회는 산 비탈레(San Vitale)로 547년 완공되었다. 250년 이상의 시차가 있는 두 교회의 유사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역사는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지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의 기운이 쇠하던 394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두 아들에게 상속했다. 이듬해 황제가 세상을 떠나면서 제국은 분열하게 된다. 로마가 동서로 나누어진 후 채 100년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이 때 서로마제국의 수도가 라벤나였다. 493년 라벤나는 다시금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에게 넘어 갔지만, 540년 비잔틴 제국의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서로마제국의 옛 수도를 탈환했다. 산 비탈레 교회는 이때 지어졌다.

중심에 돔이 올라가 있고 팔각형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형태를 지닌 산 비탈레 교회의 내부는 비잔틴 특유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제단이 위치한 후진의 상단 좌우 벽면에는 비잔틴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황녀 테오도라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다. 교회건축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성스러운 공간에 세속 군주가 그림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라벤나의 역사성과 비잔틴 황제의 권위가 성스러운 공간과 연결되면서 상징적 의미가 피어난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라벤나의 산 비탈레 교회를 모방해 아헨에 교회를 세운 것은 비잔틴 황제가 지니고 있는 정통성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건축적 인용이다.

키가 190cm에 가까운 건장한 체구의 샤를마뉴는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렀고 항상 날카로운 보검을 지니고 다녔다. 47년의 통치기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랑고바르드를 굴복시켜 북부 이탈리아를 통치했고, 대군을 이끌고 떠난 원정에서 작센을 정복했다. 서쪽으로 진격해 스페인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동쪽으로는 도나우 강 중부 아바르 족을 무찔렀다.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은 옛 서로마제국의 땅을 거의 회복했을 정도로 서유럽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샤를마뉴의 권력이 절정에 올랐을 때 795년 로마에서는 레오 3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혈통적 콤플렉스가 있었던 샤를마뉴는 교황과의 돈독한 친분을 쌓기 위해 막대한 축하 선물과 함께 ‘교회와 교황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내며 교황에 대한 충성을 드러냈다. 교황 역시 강력한 세속군주의 지원이 절실하던 차였다. 로마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교황의 자리에 오른 레오 3세는 늘 위협에 불안한 처지였다. 799년 4월 25일 교황은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 했고 마침 샤를마뉴의 사절단 호위 군인들이 그를 발견하고 구출해 준다. 교황은 이에 대한 답례로 800년 성탄절 날 샤를마뉴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불렀고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준다. 샤를마뉴의 정치적 정당성을 교황이 인정한 것이다. /김석모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