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고딕의 대성당 건축은 서양 중세미술의 결정체라 부르더라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중세가 추구했던 정신적 가치가 대성당 건축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완성된 것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형태와 기술이 한 지점에서 만나 이루어낸 것이 고딕의 대성당 건축이다.

중세 고딕의 대성당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12세기 중엽 처음 등장한 고딕양식이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파리의 노트르담이 지어질 즈음 고딕만의 안정된 건축 언어를 찾을 수 있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건축의 초석을 놓은 이는 교황 알렉산더 3세(재위 1159∼1181)인 것으로 알려진다. 1163년 교황이 파리에 체류한 일이 있는데 이 때 성당이 지어졌다. 당시 파리의 주교는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라는 사람이었다. 주교는 건축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을 했고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후원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교회건축은 주제단이 있는 동쪽 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182년 동쪽 부분의 건축이 마무리 되면서 주제단 아래 지하 크립트에 성유물이 안치되었다. 교회건물의 몸통에 해당하는 주랑과 측랑 공사는 1180년과 1200년 사이 완성되었고 1230년경 내부 주랑의 채광을 확보하기 위해 4층이었던 벽면 구조를 3층으로 수정하면서 넓은 창문들을 설치했다. 주랑과 익랑이 교차하는 교차랑 위로 첨탑이 올라갔고 측랑 외벽 버팀부벽 사이사이 공간에 소예배당이 마련되었다. 소예배당은 측랑에서부터 주제단으로까지 연결되어 있어 평면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의 모습이 거대한 배처럼 공간의 통일성을 이루어낸다. 신랑의 천정에는 6분할된 교차형 늑재궁륭이 설치되어 건축의 견고성을 한 층 높여주었다.

주제단이 위치한 동쪽 바깥 벽면에 거대한 공중부벽이 설치된 것은 1296년과 1320년 사이이다. 고딕 대성당에 인상적인 외형을 입혀준 공중부벽은 장식적인 요소라기보다 붕괴위험을 낮추기 위한 중요한 건축공법이다. 1258년부터 기존에 협소했던 남쪽과 북쪽 익랑 확장공사가 시작되었다. 익랑의 확장공사가 마무리되었을 때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남북 익랑 파사드 상부에 크고 경쾌한 장미창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두 곳의 장미창은 서로 짝을 이루며 북쪽은 구약성서의 장면으로 남쪽은 신약성서의 장면으로 장식되었다.

1200년경 시작된 서쪽 정면 파사드 공사가 1245년 무렵 마무리되면서 대성당의 장엄한 모습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십자형 구도의 전형적인 5랑식 바실리카 형식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길이가 122.5미터 폭이 12.5m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웅장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에는 세 개의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다. 각각의 출입문 위에 설치된 팀파늄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중앙 출입문 상당 팀파늄에는 ‘최후의 심판’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성 안나, 좌측에는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나타난다. 출입문 바로 위층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 스물여덟 명이 전신 입상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왕들의 회랑’으로 불린다.

이 조각들은 프랑스 혁명기 때 모두 파손되었다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왕들의 회랑 위층 중앙에는 지름이 9.6미터에 이르는 대형 장미창이 들어가 있다. 장미창 위로 일련의 기둥과 아치가 고딕의 전형적인 창틀 트레이서리 모양으로 줄지어 있어 파사드의 무게감을 한층 덜어주면서 경쾌한 느낌을 불어 넣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파사드 가장 높은 곳에 20미터 높이의 뾰족한 종탑 두 개가 짝을 이루며 위용을 뽐내야 했지만 아쉽게도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안정적이고 네모진 모양의 종탑이 올라갔다.

/김석모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