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성상파괴운동

라벤나의 산 비탈레 교회. 547년 완공

서양미술사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지역에서 나타난 미술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지금의 서유럽 각 나라들은 국경을 통해 서로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술사 전개에 있어서도 나라 간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중세미술을 살필 때는 역사를 바라보는 다른 틀이 필요하다.

중세미술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긴 시기를 차지한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게르만의 침입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 중세가 시작되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1400년까지 이어졌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중간에 나타난 시대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 ‘중세(中世)’이고, 르네상스인들은 이 시대에 ‘암흑’이라는 ‘부당한 수식어’를 붙였다. 미술사적으로 이 수식어가 부당한 이유는 중세 전체가 암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혼란이 극심해 학문과 문화 예술이 쇠락한 시기도 분명히 있었다. 예컨대 500년에서 800년 사이가 특히 그렇다. 이 시기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의 군소 부족들이 여러 지역에 터를 잡으면서 시시각각 전쟁과 약탈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런 혼란기에도 비잔틴 제국에서는 예술이 융성했고 비잔틴 최고의 기술자들이 옛 서로마제국의 땅으로 건너와 걸작들을 남겼다.

이탈리아 북동부 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한 고도(古都) 라벤나에는 비잔틴 미술의 걸작들이 지금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특히 초기 기독교 미술에 있어서 라벤나는 성지나 다름없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당시 제국의 수도가 라벤나였고 이민족에게 빼앗긴 땅을 비잔틴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수복하면서 기념비적인 교회들이 세워졌다. 그런데 정작 비잔틴 제국이 자리하던 지금의 터키나 북아프리카 혹은 중동지역에서는 그 화려했던 미술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이것은 기독교가 종교적 체계를 잡아가던 과정에서 미술품 사용에 대한 동서 교회의 입장이 달랐던 것과 관계가 있다.

교회에서의 미술품 사용은 우상숭배라는 민감한 신학적 문제에 닿아 있다. 대교황 그레고리우스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림 사용을 적극 옹호한 가운데 동방교회는 성상사용을 반대했고 급기야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성상에 반대한 동방교회의 핵심 논리는 이렇다. 예수나 마리아 혹은 성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들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예수는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난 신이다. 이것을 성육화(Incarnation)라고 한다. 예수는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사람으로 그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 그림은 인간 예수의 모습을 담을 수 있지만 그의 신성은 물질로 표현지 못한다. 따라서 예수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 자체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는 행위로 교리에 반할 뿐 아니라 물질적 대상을 경배하는 우상숭배라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의 성상옹호론자들은 동일한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온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육체 안에 신의 형상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뜻함으로 그림으로 그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성상을 둘러싼 논쟁은 비잔틴의 황제 레오 3세가 성상반대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726년 황제는 ‘성상 금지령’을 내렸고 교회를 장식하던 비잔틴의 미술품들이 대거 파괴되었다. 이 때부터 100여 년 동안 비잔틴 제국에서는 성상파괴운동이 진행되었고 그 여파로 대부분의 미술품이 희생되었다.

성상 금지령이 발효되자 가톨릭의 서방교회는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가 어려워졌고 이를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에 바치던 세금을 중단한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동서 교회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된다. 사실 로마 가톨릭에게 성상 금지령은 분쟁의 명목에 불과했다. 서방 교회의 속내는 비잔틴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고 결국 두 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