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20)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20)
  •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
  • 등록일 2012.11.25 21:45
  • 게재일 2012.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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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놈` 천대와 수탈의 파도를 이겨낸 어민들
불교 유입된 삼국시대 `어로 금지`… `사농공상` 신분제 조선시대엔 최하층 전락

▲ 이른 아침 해상에서 고된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선원들이 영덕군 영덕읍 강구항에서 그물에 걸린 멸치를 털고 있다.

최근 한 방송사의 교양프로그램을 통해 잘 알려졌듯이 유럽의 근세 국가 중 네덜란드를 세계 최고의 무역국 반열에 올리며 국부를 일군 주역은 바로 청어잡이에 나선 어업인들이었다. 하지만 사농공상의 신분제에 강박돼 있던 조선의 어민들은 `뱃놈`의 천대를 받으며 백정이나 다름 없는 최하위 신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식솔을 건사하기 위해 험한 바다에 몸을 맡긴 채 칼바람 속에 거친 노동을 감수해야 했으며 때론 해안선을 침략하는 외적에 맞서 항쟁의 최선봉에 서기도 했다. 고난 속에 단련된 원형질의 강인함은 이제 경북동해안 사람들의 심성에 심어져 정체성의 한 맥으로 이어지고 있다.


글 싣는 순서
<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
 
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
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
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
19)새 세상을 하늘에 빌다- 동학
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


어로금지령에서 사점(私占)까지
우리 역사, 특히 산업사를 살펴보면 유독 수산업에 관한 기록이 상당한 부족함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세계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도 패총 속에서 낚시바늘과 어망의 석추 등이 발견돼 선사 시대에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어로작업이 짐작되고 있다. 특히 경북동해안 울진의 유적에서 발견된 고대 어선의 제작 시기는 세계 최고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산업과 그 종사자들에 대한 역사적 홀대의 뿌리는 깊다.

철기문화의 시작과 함께 열린 삼국시대에서 어업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고작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어량(魚梁)`을 통해 하천이나 얕은 해안에 고정적인(정치) 어구를 설치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가 유입된 이후에는 백제 법왕 즉위 원년(599)에 내려진 살생 금지령으로 어로행위가 금지됐을 정도이다. `영덕군지`에 따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법흥왕 16년(529) 살생 금지와 어구 소각의 기록이 나온 것으로 보아 어업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각종 어구와 어장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개국 초기부터 토지와 마찬가지로 왕자들이나 권문세가에 하사되거나 수탈 대상이 됐다. 특히 후기에 들어서면 정치와 세제의 문란으로 권문세가가 토지를 다투어 점유하면서 어량도 포함시켜 어민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특이한 점은 元(원)나라의 다루가치가 함경도나 경상도에서 고래기름을 구했다는 기록을 통해 동해안을 중심으로 포경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하면 조선기에는 비교적 풍부한 자료가 남아 있는 편이다.

건국 후 어업제도 개혁을 통해 어장의 불법 사점(私占)을 국유화 해 어세를 징수케 했으며 성종 대의 경국대전에는 빈민들에게 3년씩 어업면허와 유사한 권한을 준 것으로 보아 어업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장국유제는 또 다시 사점의 성행으로 문란해져 균역법 시행으로 재개혁되는 등 굴곡을 거듭하다가 1880년대 부터 한반도의 어자원 수탈에 나선 일본 어민들에 의해 잠식돼 갔다. 특히 정어리는 1937년 동해에서 140여만t이 어획돼 당시 단일어장에서 단일 어류로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 포항 북부해수욕장 인근에서 잡은 멸치를 환여동 아낙들이 작업장에서 가공하고 있다.


비참한 어촌의 실상
다산 정약용은 1801년 3월9일 나이 40세에 첫 배소(配所)인 포항 장기땅에 도착해 7개월 열흘 동안 머물며 18년간의 유배를 시작한다. 다산의 기록을 통해서도 당시 어촌의 곤궁한 실상은 잘 드러난다.

당시 다산은 장기읍성 동문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거나 신창리 앞바다에 나가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구경했다.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해녀의 물질을 구경(`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안 걸치고/ 짠 바다 들락날락 맑은 연못같이 하`-「아가사」)했으며 잡힌 오징어 등 물고기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기도 했다. 또 그는 실학자답게 어부들이 칡넝쿨을 쪼개 만든 그물로 고기를 놓쳐 버리는 것을 보고 무명과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 것을 권고하고 부식을 막기 위해 소나무 삶은 물에 그물을 담갔다가 사용할 것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전해 들은 현감은 `백성이 입을 옷감을 짤 무명도 없는데 어떻게 무명실로 어망을 짜겠느냐`며 호통을 쳐 묵살했다고 한다.

다산은 이처럼 어리석고 오만한 관리들이 장기의 어민들을 수탈한 상황도 `장기농사` 10수 속에 담아놓았다. `상추잎에 보리밥 싸서 파 고추장 섞어 먹세/ 금년엔 넙치마저 구하기 어렵구나/ 잡는 족족 말려서 관청에 바쳤으니`.

또 다른 문헌을 통해 해난 사고에 희생되는 어민들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장기발전연구회가 발간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에 따르면 `승정원일기`숙종 37년 2월10일에는 68명이 한꺼번에 바다에 나가 빠져 죽어 휼전(恤典)을 베푼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한 근대 유럽에서도 청어잡이에 나선 어민의 3분의 1이 해난 사고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전근대적 어로 현실에 놓인 조선 어민들의 희생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제국주의의 야욕을 키워가던 일본의 어민들이 침탈의 선봉에 선 기록도 안타깝다. 1895년(고종 32·을미년)에는 장기군 근해에서 어물을 빼앗고 배와 그물을 파괴했으며 육지로 침범해 인가에 난입해 백성을 위협하고 부녀자를 잡아가는 등 작폐가 심각했다.

▲ 일제강점기 경주시 감포읍 어시장의 옛 모습


노동요가 위로한 어심(漁心)
민요는 민중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향토성과 민족성을 담아 가락으로 표현한 양식이다.

그중에서도 노동요는 의식요, 유희요와 달리 노동이 주는 육체의 고통과 불만을 덜고 노래를 통해 즐겁게 수행하기 위한 지혜에서 고안됐다.

경북동해안에도 구수한 사투리를 담은 어업 노동요가 전해지는데 주로 그물당기는 소리, 고기 푸는 소리, 노젓는 소리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포항의 `그물당기는 소리`는 `명사십리 해당화야 이여차/ 너 꽃 진다 설워 마라 이여차/ 명년 춘삼월 돌아오면 이여차/ 너는 다시 피건만은 이여차/ 불쌍하고 가련하다 이여차-`. `멸치 그물 당기는 소리`는 `모여 소리 나거들랑/ 동네 사람 다 붙어라/ 이여 소리만 잘하며는/ 모든 고기 다 잡힌다`의 내용이다.

영덕의 어업노동요는 노물리의 창자(唱者)들의 덕분에 `영덕군지`에 잘 채록돼 있으며 내용도 풍부한 편이다.

`노 젖는 소리`는 `-/ 한주먹을 누어놓고 (이하 반복)어허 저서보자/ 이자지차 잘도 전다/ 젖는 노를야 저사가고/ 노는 사람은 다틀랬다/ 일물에 일사공아/ 허리깡 화장아야/ 이차저차 저서간다/ 홍물에 화장수로구나/ 탁주 한되를 마셨으면/힘이나 벌떡나게/ 이수저수 다보내고/ 우리 고향 다돌아왔다`(천연출, 1972년).

`가래노래`는 그물을 당기면서 부르는 선후창으로 `어허 가래요(선) 어허 가래요(후, 이하 반복)/ 그물코가 삼천리라도/ 걸릴날이 있다드니/ 오늘날로 걸렸구나/ 은가락지도 여게서 난다/ 온갖 색시도 여게서 난다/ 비바리도 여게서 난다/ 까끄무도 여게서 나고/ 젓아보자 젓아보자/ 육천리 먼먼길에/ 팔이 아파 우에젓노/ 젖는 노를 멈추지 말고/ 빨리 젓어보자/ 세월 봄철아 가지를 마라/ 알뜰한 청춘 다 늙는다`(김유근, 1972년).

`마개노래`는 어장의 그물을 당기거나, 배를 육지로 당겨 올릴 때 부르는 소리의 선후창으로 `어허 마개야(선) 에이아라 돌려보자(후, 이하 반복)/ 고기도 고기도 많이 들었다/ 방에(방어) 카나(랑) 광에(광어)카나 많이도 들었다/ 어허 마개야/ 운반선을 맥히기 실어보자/ 우리 앞에 대어놓고/ 군사들아 군사들아/ 일을 알뜰히 알뜰히 해여보자/ 한치기만 씨리면(실으면) 술이 한말이다/ 방에 한마리 후비나라(훔쳐놓아라)/ 집에 구수가 소주 한빙 먹어보자/ 먹자주의다 먹자주의다/ 방에 한마리 천원 받는다/ 천원 받으면 술이 두말이다/ 여러기 먹어도 남는다/ 전주(주인) 보면 도둑놈 칸다/ 우리들은 먹어보자/ 그래 안된다 소주한잔 주자/ 내일일라 광에 한마리 후비자/ 그마 술먹자`(고천수, 1972년)



□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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