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동해안 진출이 역사적 분수령 이루다
소국들 병합하며 포항·영덕·울진지역까지 팽창
경북동해안, 고인돌문화에서 철기문화의 꽃 만개

▲ 포항시 호미곶면 강사리에 있는 고인돌 /이용선기자

경북 동해안 지방에서 꽃피었던 철기문화를 알려면 먼저 한국의 철기시대에 대해 기본적인 요소들을 알 필요가 있다. 철기시대의 사전전 풀이는 인류의 획기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물질문화 발전 단계에서 연모를 철기로 만들어 썼던 시기로 거침없는 문화의 발전이 이어진다.

글 싣는 순서

<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

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
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
3)경북 동해안의 소국
4)동예인들의 후예
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
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
8)고래의 고장 영일만
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
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

우리는 오랫동안 북쪽지방의 철기시대 유적에서 명도전(明刀錢)이 나온 것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철기문화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했다. 명도전이라는 유물이 중국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연(燕)나라에서 만든 금속화폐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철기시대 유적들에서 위연, 강계, 덕천 등의 유적에서 명도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철기술을 갖고 있던 연나라로부터 우리나라에 철기문화가 들어온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그 시기는 기원전 3세기 무렵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는 명도전의 출토지가 랴오둥(遼東)반도에서 시작해 압록강 중류를 거쳐 청천강 유역에까지 이른점을 감안하면 연나라와의 교역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도 한다.

실체적 증거를 찾는 노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중국제철기술과 다른 자체기술

이들 유적을 초기 철기시대로 본 것은 그곳에서 나온 철기들이 자체 생산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제품을 들여와 쓴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철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철기유물들의 성분을 분석해본 결과 중국의 제철기술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자체 생산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철기시대로 들어서기는 했으나 생산도구의 일부만을 철기가 대신했을 뿐 앞선 시기의 청동기들과 함께 석기도 여전히 쓰이고 있었다. 이른바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로 구분하는 시기이다. 철낫· 철보습· 철반달칼· 철괭이 등 농업 생산도구들이 철로 바뀌었으나 의례와 신분을 상징하는 비실용성 도구들은 아직도 청동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청동기들은 세형 동검(細形銅劍)·잔줄무늬거울·청동방울(八珠鈴) 등이 있고 꺽창(銅戈)과 같은 무기에도 청동으로 만든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으로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철제 농기구가 사용됨으로 농업이 발달하여 경제기반이 확대되었다. 이시기의 사람들은 농업을 더욱 발전시켜 조·기장·수수 등의 밭농사와 벼농사를 행하였다. 집의 형태는 대게 장방형 움집인데 점차 지상 가옥으로 바뀌어서 온돌 구조가 나타나며 농경의 발달과 인구 증가로 정착 생활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철제무기와 철제연모를 씀에 따라 그 때 까지 사용해 오던 청동기는 의식용 도구로 변하여 갔다.

▲ 포항시 호미곶면 강사리 이곳을 중심으로 철기시대 이전부터 부족단위가 형성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경북동해안의 항포구를 중심으로 부족국가는 점차 세력을 넓혀 나갔고 일본 등으로 철기문화를 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때 방파제를 쌓은 구룡포 항구 /이용선기자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이 시기에 이르러 청동기 문화도 더욱 발달하여 한반도 안에서 독자적으로 발전을 이룩하였다. 청동기 시대 후반이후, 비파형 동검은 한국식 동검인 세형동검으로, 거친 무늬 거울은 잔무늬 거울로 그 형태가 변하여 갔다. 그리고 청동 제품을 제작틀인 거푸집도 전국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토기도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 토기 이외에 붉은 간토기, 검은 간토기 등이 나타나고 있다.청동기 철기 시대에는 이전부터 주요한 생산도구로 사용되면 간석기가 매우 다양해지고 기능도 개선되어 생산 경제도 좀더 발달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돌토기나 홈자귀, 괭이, 그리고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 시켰다. 농업은 조·보리·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 사냥이나 고기잡이도 여전히 하고 있었지만 농경의 발달로 점차 그 비중이 줄어 들었고, 돼지,소,말 등 가축의 사육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집터 유적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된다. 대체로 앞쪽에서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북서풍을 막아 주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는 곳에 우물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취락 여건으로, 오늘날 농촌의 자연 취락과 비슷한 모습이다. 집터의 형태는 대체로 직사각형이며, 움집을 점차 지상가옥으로 바꿔 갔다. 움집중앙에 있던 화덕은 한쪽 벽으로 옮겨지고, 저장 구덩도 설치하거나 한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들었다. 창고와 같은 독립된 저장 시설을 집 밖에 따로 만들기도 하였고, 움집을 세우는 데에 주춧돌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사회와 경제의 발달에 따라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시기의 예술을 종파나 정치적 요구와 밀착돼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족장들이 사용했던 칼,거울,방패 등의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그림 등에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기시대는 생산력이 일정한 정도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생산력 발전을 바탕으로 이미 고대국가단계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북쪽에서는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인 위만조선이 등장하며 남쪽에서는 삼한의 소국들이 일어나는 단계가 된다. 따라서 철기시대는 이미 역사시대로 들어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본격적인 철기시대

고조선이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건국을 한 후 역사무대에 등장하면서 여러차례의 정치적 변동을 거쳐 위만이 집권하는 시기에는 이미 철기를 사용하는 철기시대로 들어 갔으며, 고조선이 망한 후 우리 민족들은 중국 세력들을 물리치면서 부족으로부터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남쪽에는 삼한(三韓)의 새로운 국가들이 건국되었다.

이 중 경북 동해안과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하는 새로운 나라들은 위쪽의 옥저와 동예(東濊), 삼한 중 진한(辰韓)이다. 그중에서 가장 가까이 있어 직접 문물 교류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보는 나라들은 동예와 진한의 소국들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존재하였던 경북 동해안의 소국 명칭들은 울진, 영덕, 포항지역의 연혁에 자신들의 존재를 뚜렷이 내보이고 있다.

이번 취재 지역의 역사적인 환경은 무엇보다도 소국들을 병합하고 새로운 큰나라가되는 신라(新羅)와 가까운 지리적 입지 때문에 신라의 성장과정, 즉 사로국(斯盧國·新羅) 팽창의 한 루트인 동해안 진출과 관련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역사적인 환경은 시기적으로 신라의 동해안 진출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 볼 수가 있다.

신라의 동해안 진출 이전 이 지역의 정치적인 상황은 먼저 이들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 철기 시대의 유적을 통하여 성격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신라의 진출 이후의 시기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 그리고 현존하는 사료들이 그 중심이다. 경북동해안에 철기시대가 꽃피었다는 증거들이다. 고인돌문화에서부터 철기시대가 만개하기까지 그 실체는 무엇일까.

□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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