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유배의 땅, 좌절한 인재를 거두다
포항 장기면과 영덕군, 고려·조선시대 가장 엄중한 죄인 보내져
장기서 18년 유배생활 첫 시작한 다산 정약용 130여편의 시 등 남겨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장장 17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하기에 앞서 첫 배소(配所)인 포항 장기읍성 인근의 민가에 의탁한 220여일 동안 130여편의 리얼리즘 한시를 남겼다.

역사 속의 고려와 조선에는 많은 정변이 교차하면서 권력에서 내쳐진 죄인들은 죽음만 면했을 뿐 왕의 처소와 격리되는 고난 속에서 연명해야 했으니 바로 유배였다. 그 유배자 중에는 권력다툼의 패배자로 전락해 실의에 빠진 채 성은(聖恩)만 학수고대한 파락호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다산 정약용처럼 유배의 고난과 좌절을 한민족 역사를 통틀어 으뜸가는 학문으로 승화시킨 불굴의 도전자도 적지 않았다. 거친 해풍의 풍토에다 왕도(王都)로 부터 섬이나 다름 없이 격리된 경북동해안은 상처 받은 이들을 보듬어 민초들과 새로이 교류하거나 문학을 배태시키는 장이 되었다.

글 싣는 순서
<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

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
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
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
19)새 세상을 하늘에 빌다- 동학
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

절해고도와 다름 없는 유배지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조선시대 이름난 유배자들의 이야기와 그 유배의 현장을 답사한 사진들로 꾸며 최근 발간돼 화제를 모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유배의 고난 속에서 `낙관이냐, 낙담이냐`의 두 유형으로 대별되는 유배자들의 처신이 한동안 여운으로 남는다.

중죄인의 경우 방구들조차 성하지 않은 허술한 오두막에다 탱자나무로 좁고 높게 애워싸게 해 하늘 조차 잘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만들고 개구멍으로 밥을 넣어주는 위리안치의 형벌. 아무리 고관대작이었더라도 아전이 고약한 마을에 처해지면 온갖 구실로 제재를 받고 평민에게 조차 행패를 당하기 일쑤였던 당시의 기록들이 유배의 처지를 실감케 한다.

유배지의 비참한 현실이 왕의 침소에 까지 이르렀던지 영조 때는 몇몇 예를 제외하면 흑산도처럼 험하거나 무인도에는 유배를 금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유배지는 주로 제주도, 백령도 등 섬이며 심지어 남해의 거제도도 등장하는데도 우리 경북동해안 일대는 어떤 언급도 없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영덕, 영해 등 일대에 숱한 유배인들의 이야기와 작품들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도 이 책은 간과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에 와서 과거 유배지로서 우리 지역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정약용과 같은 `걸출한 유배 종결자`의 이야기를 전남 강진군에 선점당한 채 압도돼 스토리텔링으로 재해석하거나 문화관광의 요소들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한 책임도 있을 것이다.

포항 남구 장기면과 영덕군, 경남 기장은 고려의 수도 개성과 조선의 한양에서 3천여리의 거리이므로 유배형 가운데 가장 엄중한 죄인이 주로 보내졌다. 오죽했으면 조선 태종대에 대속(代贖), 이른바 유배의 거리 대신 돈으로 대체가 가능해지면서 이 지역의 액수가 2~3위에 오르게 됐겠는가.

중세가 선호한 유배지, 장기

▲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 송시열이 심었다고 알려진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포항 장기 출신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 한 교수와 고위 관료, 군 장성과 기업인들이 수두룩하다. 장기사람들은 향토사 연구에도 포항 전역에서 인정 받을 만큼 남다른 열의를 보여 지난 2006년에는 장기발전연구회가 향토사 연구총서인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를 발간했다. 이 책은 장기에 우암 송시열에서 다산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현량과 학자가 머물고 갔으며 그 영향으로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조성됐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물론 한국사 전체에서 장기는 인접한 월성이 신라의 근거지로서 천년동안 누렸던 융성의 혜택을 가장 많이 나눈 곳이었음을 감안할 때 지나친 겸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니면 고려와 조선에 들면서 신라의 터전이 차별로 인해 뛰어난 철기문화와 천년 수도의 배후지로서 축적한 문화가 쇠퇴했다가 다시 부활했다는 언급을 생략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여하튼 장기는 여말선초(麗末鮮初)에는 귀화 위구르인 설장수가 정몽주 피살 당시 일파로 몰려 유배된 기록을 시작으로 지금의 검찰총장인 대사헌 홍여방은 유배됐다가 사면돼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단종 복위운동 당시 형조참판이던 사육신 박팽년의 인척들은 관노로 영속돼 장기현의 관노로 내려왔다. 연산군 대에 대사간 양희지가 사초문제가 발단이 된 무오사화에 휘말려 유배됐으며 기사환국 때 영의정 김수흥, 신임사화 때 판서 신사철 등도 고초를 겪었다.

이밖에 왕의 잘못을 간하는 언론의 역할을 하는 직무 특성상 미움을 받기 일쑤였던 종3품 사간 가운데 이세진, 정술조, 송영 등은 파직돼 유배나 다름 없는 장기현감으로 온 인물들이다.

다산 정약용과 우암 송시열

▲ 다산은 지금 장기중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느티나무 숲을 거닐며 시 `유림만보`를 지은 것으로 전한다. /장기발전연구회 제공
다산은 18년에 걸친 유배의 생애에서 7개월 10일(약 220일)을 장기에서 첫 시작한 뒤 17년을 강진에서 보냈다. 그는 첫 유배가 주는 부담과 고통으로 인해 가장 혹독한 경험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장기에 머문 동안 빼어난 사실주의 시인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강진에서 이뤄낼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불후의 저작을 예고했다. 장기 땅에 첫 도착한 그의 마음은 기성잡시의 한수를 통해 전해진다.

`산머리에 쓸쓸한 민가 마흔 채/ 기울어진 성문이 시든 꽃 속에 있네/ 물 마실 샘은 한 곳도 없어/ 성에다 줄 매달아 수차를 쓰라 하네/ 조해루 용마루에 저녁놀이 붉게 물들 무렵/ 관리가 나를 몰아 동쪽으로 나왔네/ 시냇가 자갈밭에 초가집 한 채/ 늙은 농부 만나서 주인 삼았네.`

그는 장기에서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수, 고시 27수 등 130여 수의 리얼리즘 한시와 남인의 예론에 관한 시비를 논한 기해방례변, 한자 발달사를 다룬 삼창고훈, 한자 자전류 이아술 6권, 농어민의 비참한 질병치료를 돕고자 한 의서 촌병혹치 등을 남겼다. 이곳에서 한양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도 세편 전한다. 다산의 사실주의가 돋보이는 장기농가 10수 중 제5수에서는 특유의 근면성과 휴머니즘에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에서 언급된 고약한 현지 아전이나 백성과는 다른, 장기사람들과의 정도 옅보인다.

`새로 깐 병아리 작기가 주먹만해/ 여리고 노오란 털이 어여쁘기 짝이 없네/ 그 누가 어린 딸 공밥 먹는다고 말하는고/ 꼼짝 않고 붙어 앉아 솔개 쫓는 것을.`

촉망받는 개혁가의 꿈이 좌절된 다산은 변방의 민초들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정작 그들은 지치고 불안했을 서울내기 유배 초년생을 경계하지 않고 보듬었다.

일국을 좌우한 우암 송시열은 다산보다 120여년 앞서 장기에 보내졌다. 사단법인 포항지역사회연구소가 펴낸 `한권으로 보는 포항의 역사`는 두 사람의 장기 유배를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비교했다. `다산의 자취는 오직 시문에만 남아 있지만 우암은 토호들의 손으로 세운 생사당인 죽림서원으로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다산의 `기성잡시`를 거론한 것으로 `죽림서원이 마산리의 남쪽에 있으니/(중략)/촛불 들고 멀리서 찾아가도 반기지 않고/시골 사람들 아직도 송우암만 이야기하는구나`는 내용이다.

장기발전연구회의 노력으로 인해 지금 장기에는 노론의 거두 송시열과 대표적 남인인 다산이 시기를 달리한 앙숙임에도 한 자리에 두 개의 사적비로 남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또 다른 유배지 영덕

▲ 다산사적비의 모습.
`영덕군지`에 따르면 영영승람과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50여명이 유배지 영덕을 거쳐 갔다. 대표적 인물은 고려 예문관 대제학 윤신걸, 신돈의 전횡을 비판한 신현, 정도전과 남은 등에 대한 권력 집중을 비판한 변중량, 단종 3년에 세조에 의해 관노가 된 김처선 등이다. 조선의 대문호 윤선도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제대로 못 모셨다는 죄로 8개월 간 유배되는 동안 시와 부 20여수를 남겼다.

□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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