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경북 동해안은 `고인돌 왕국`
대부분 고인돌 울진·영덕 보다 포항에 집중적으로 분포
농경생활 공동체, 조상의 무덤으로 영역 설정 위해 축조

▲ 포항시 북구 흥해읍 용천리 고인돌. 덮개돌의 형태는 부정형 괴석으로 규모가 큰 편이며, 받침돌은 대부분 땅에 묻혀 있어서 1개만 확인된다. 고인돌 옆에는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고묘 1기가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경북 동해안에는 고인돌이 많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이루어진 중요한 유적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청동기 시대의 실상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이미지를 중단 없이 발신하고 있다. 이 의미 있는 신호들이 잦아들기 전에 바른 해석을 해두어야 하는 것, 그것은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화적 책무이다.

고인돌을 말뜻대로 풀이 한다면 굄돌로 고여 놓은 돌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거대한 바위가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밑에 고임돌(支石)·묘역 시설·무덤방(墓室) 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외형에 의해 크게 북방식·기반식·개석식·위석식 등 4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거대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들이 누렸던 권력과 부의 크기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군장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여 권위를 세웠고, 천손 사상을 내세워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였다. 이에 사회 규모는 더욱 커졌고, 국가도 출현하였다. 고조선은 이 시기에 출현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였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들을 알아볼 수 있는 고인돌들이 경북 동해안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낸 것은 왜일까.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미동도 없이 버텨내고 있는 까닭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 하는 걸까.

글 싣는 순서

<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

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
2)경북동해안과 고인돌
3)경북 동해안의 소국
4)동예인들의 후예
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
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
8)고래의 고장 영일만
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
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

□울진은

울진 지역에서 나타나는 청동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바다와 가까운 해안가에 있다. 특히 주거지는 낮은 구릉상에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영동 지역과 거의 유사하다. 또 고인돌도 일부는 기반식이나, 대부분은 개석식으로 영동 지역과 남쪽 해안 지역인 영덕과 포항 지역에서 확인되는 것과 서로 통하고 있다.

▲ 울진군에서 가장 큰 북면 신화리 고인돌.
경북 동해안의 북쪽 끝 울진읍 북면에서 포항시 장기면 계원리 해안의 남쪽 끝까지 경북 동해안의 중요 고인돌들을 따라 가보자. 울진 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들은 발굴 조사되지는 않았다. 현재까지 지표 조사에서 확인된 70여 기의 고인돌 가운데 북방식과 위석식은 보이지 않는다. 기반식과 개석식만이 확인되었다. 울진군 북면 나곡 부구 1리 부구2리 신화1리 고목3리에 27기, 죽변면 화성리 봉평리에 2기가 있다. 울진읍의 호월2리 명도1리 읍남4리에 6기가 있다. 근남면 수산리 4지역 수곡2리 구산2리 진복 1리에 28기, 원남면 덕신 1리 2기, 기성면 삼산1리 척산3리 정명 2리에 11기가 있다.

□영덕은

영덕의 고인돌은 발견되어 보고된 것이 얼마되지 않는다. 영덕군의 해안은 울진 보다는 훨신 넓은 평야를 끼고 있고 구릉성 산지와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강과 천 들이 있어 청동기 시대에는 고인돌이 많이 축조 되었음을 추정 할 수 있다. 영덕의 고인돌로서 지금까지 조사된 대표적 고인돌은 남산리 고인돌 등이다. 이 고인돌은 영덕읍 남산리의 농공단지 진입로 왼쪽에 놓여 있다. 고인돌은 농공단지 조성을 위하여 발굴조사를 시행하였는데 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 영덕군 병곡면에 있는 금곡리 지석묘.
병곡면에 있는 금곡리 고인돌은 금곡리의 논 가운데에 1기가 있다. 덮개돌 윗면에서 9개의 성혈(性穴)이 관찰되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지름 9㎝·깊이 4㎝에 이른다. 주변에 있는 묘(墓)의 축대에 쓰인 돌들도 원래 고인돌의 덮개돌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병곡면 영리에 있는 3기의 고인돌도 덮개돌의 평면 형태는 모두 장방형이다. 영덕면 해안에서 남쪽으로 더내려오면 포항시의 해안이다.

□포항은

포항에는 해안쪽으로 형성된 구릉성 산지가 많고 배산임수(背山臨水) 지역으로 마을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 많아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가 많이 발굴되고 있다. 따라서 많은 고인돌 군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포항에서 조사된 고인돌은 전 행정구역 내에서 `108` 군집 총 `432`기의 고인돌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 통계와 아직도 남아 있는 고인돌 수를 보면 가히 고인돌 왕국이라 할 만 하다.

이 중에서 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고인돌 군집들을 살펴보면 북구지역에서는 송라면 지경 화진 방석리에 12기 , 청하면 월포 용두 고현 미남 소동리에 19기, 흥해읍 용곡 양백 용천 금장 흥안 남송 칠포 용한 초곡 성곡리 113기, 남구 연일읍의 달전 학전 자명 중명 우뵥리에 27기, 대송면 장동 대각리에 2기, 오천읍 세계리 2기, 동해면 도구 신정 금광 공당 흥환 발산리에 38기, 대보면 대보 강사리에 11기, 구룡포읍 성동 하정리에 14기, 장기면 학계 서촌리에 12기가 있다.

□정치권력집단 존재 의미

이러한 현상은 경북 동해안 지역이 일찍부터 고인돌 유적을 남길 수 있는 정치권력 집단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집단의 활약은 국가 발생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 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남긴 유적 중에서 고인돌이 표지적인 유적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이곳은 그러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의 정치적 변동이나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일어나는 변동에 따라 유·이민들이 동해안 루터를 타고 내려와 한반도의 남부지역으로 이주하여 선주민들과 더불어 여러 소국을 형성 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사회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이때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북 동해안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인돌 유적은 이 지역에 형성되었던 소국의 실체를 알아 볼 수 있는 표지적 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경북 동해안의 고인돌은 앞으로의 연구에 따라 지금까지 보내고 있는 신호에 대한 해명이 분명히 이루어 질 것이다. 경북 동해안의 고인돌에서는 어느 고인돌 유적에서 나왔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유물들이 다수 수습되었다. 발굴을 통하여 출토된 유물은 그 수가 적다. 수습된 유물들은 무기류로 석검과 한국식 동검, 토기류로 붉은간토기 조각과 무늬 없는 토기조각들을 볼 수 있다. 농경용으로 돌도끼, 홈자귀, 수확용인 돌낫, 반달돌칼 등이 출토되고 있다. 돌도끼, 홈자귀 등의 공구류와 고기잡이에 쓰던 그물추, 실을 뽑는 기구인 가락바퀴 등이 나오고 있다. 이 외에도 석기제작과 재가공에 쓰던 숫돌, 곡물을 가공할 때 사용하였던 갈판과 갈돌 등의 생활용구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 경북 동해안의 고인돌 사회는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혈연을 중심으로 한 유력자가 출현하여 지배집단을 형성하고 수장들이 등장하였다.고인돌의 축조에 있어서는 거대한 바위를 채석하고 운반하여야 한다.

□영역의 점유표시

이 과정에서 수십 t에 이르는 거석을 채석해서 운반하는데,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는 정착생활이 필수적이며 여기에는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농경생활을 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고인돌 축조는 농경 정착생활 속의 공동체의 집단 의례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에는 안정적인 생계지원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농경지 확보에는 공동체 간의 영역 설정이 필요하였고 갈등이 심화되어 갔을 것이다. 이 영역의 점유표시로서 조상의 무덤을 고인돌로 축조하였을 것이다. 경북 동해안의 고인돌이 지역별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고인돌의 축조와 관련하여 덮개돌의 채석에서 돌을 다룰 줄 아는 전문장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 중에서도 청동검과 간돌검은 지배계층 무덤의 부장 품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을 가진 숙련된 전문인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간돌검은 일정한 석질을 사용하고 있어 석재의 구입과 능숙한 제작 기술자가 필요하고 만들고자 하는 형태를 제도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인돌 축조에는 다양한 기능을 지닌 전문 집단이 있었을 것이고 집단 간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이에 상응하는 전문적인 항해술도 갖추었을 것으로 미뤄 짐작 할 수 있다.

□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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