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⒀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⒀
  •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
  • 등록일 2012.11.01 20:05
  • 게재일 2012.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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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대양을 헤치고 `신라스타일` 전하다
장보고 선단 항해사 `지문·천문·수문항법` 사용 능력 갖춰
신라만의 독창적 `신라선` 존재… 당시 日 국가사업에도 사용

▲ 포항 도심을 흐르는 동빈내항에 위치한 송도동 일대 조선소는 한국 연근해 해운과 수산업사의 산 증인이자 고대로 부터 이곳 경북동해안과 신라에 움튼 조선기술이 남겨진 현장이기도 하다. /이용선기자

본지가 그동안 독자들과 나눠본 연오랑 세오녀의 세계는 역사이든, 신화이든 우리 지역의 정체성이 선진 문물의 바다 건너 전달과 교류의 한 상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명확한 역사의 세계에서 우리 지역의 사람들이 어떤 과학의 힘으로 바다를 건너 세계와 교류하고 경쟁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볼 때가 됐다.

그 과학의 원리를 작동시킨 시작은 마땅히 현실적 동기가 우선이었다. 신라를 둘러싼 주변국들과 외교를 통해 세력을 불리고 물산을 위해 교역하는 한편 선진문물의 수용을 위한 유학의 항로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바다 너머의 세계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호기심이 최초의 씨앗이었음이 분명할 진데 경북동해안에 터전을 마련한 이 땅의 사람들은 험하게 일렁이는 대양을 돌파할 용기와 지혜 또한 갖고 있었다.


글 싣는 순서
<2부=해양개척과 도전정신의 터>

11)해양교류와 개척의 기지(基地)
12)연오랑세오녀, 태양신화와 문화자긍의 상징
13)항해와 조선의 脈은 이어져…
14실크로드, 한반도 동쪽에 이르다
15)잊혀진 옛 항로- 1
16)잊혀진 옛 항로- 2
17)해양무역시대를 잉태하다


신라의 항해술
과연 신라인에게는 저 화려한 문화예술적 안목과 유물을 오늘에 남겨 놓은 것처럼 세계에 내놓을 만한 항해술이 없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 서기 838년 바다를 통해 당나라에 입당한 일본의 유명한 유학승 엔닌은 미국의 한 동양학 교수에 의해 하나의 기록 또는 해답을 남기고 있다.

라이샤워 교수가 `입당구법 순례행기`(入唐求法 巡札行記)를 번역한 `엔닌의 당나라 여행`(Ennin`s Travels in Tang China)에 따르면 세계사적 견지에서 볼때 9세기 경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신라와 왜 등 3국간 국제해상교역은 당대의 첨단을 걸었다. 또 그는 장보고를 `한국 무역 황태자`(Korean merchant prince) 라고 표현했으며 당시까지도 동북아 바다의 주인공들은 아직 신라 사람들이었다고 적고 있다.

라이샤워가 당시 신라 사람들이 바다의 주인공이라고 한 것은 비단 동북아 해상교통의 중심이 청해진에 있었고, 국제무역의 주도권을 장보고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속에는 신라인들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항해술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신라와 일본 뱃사람의 항해 역량에 대한 비교도 눈길을 끈다.

엔닌이 당나라까지 바다를 건너 갔다가, 일본 배를 타고 산동반도 남해안까지 이르는 동안 항해는 매우 파행적이었다. 하지만 귀국 때 그를 태운 신라 선박들은 일본까지 8일만에 도착하는 등 큰 대조를 보였다. 또 다른 차이는 일본 사절단의 귀족들은 일본에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 60명의 신라인 타수(舵手)와 선원들을 고용했다.

최근식 교수의 `신라해양사연구`는 신라의 뛰어난 항해술을 뒷받침하는 항해계기로 나침반의 원리인 지남기(指南器)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특히 장보고 선단의 항해사는 지문항법·천문항법·수문항법 등을 모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문항법은 육상이나 섬의 모양과 목표물을 보고 항해하는 것이고 천문항법은 해와 별자리 등 천체를 활용하는 것이다. 수문항법은 물의 깊이나 색깔을 파악해 위치를 알아내는데 장보고는 이들 항해술로 해류와 바람이 다른 한반도 남해와 서해, 남중국해 등을 자유자재로 다녔다.

당시 신라와 당과의 무역로는 두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 방면에서 흑산도를 거쳐 중국의 상하이(上海) 방면으로 통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도 남양만에서 황해를 건너 중국의 산둥반도 덩저우(登州)로 가는 길이었다.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자 덩저우 일대에서 양쯔강 하구의 연안 일대에 이르는 지역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여, 이 지역에는 신라인들을 통괄하며 자치를 맡아보는 신라소라는 관청이 설치되고 도회지에는 신라인의 자치구역인 신라방이 형성되기도 했다.

신라의 항해술로 인해 아랍인과의 교역도 가능했다. 물론 육로 교류도 활발했겠지만 무역상들이 개척한 바닷길로 인해 고구려, 신라, 가야, 왜, 백제 등 5국 가운데 유일하게 신라에서만 로마풍의 유리구슬과 로만 글래스, 석류석, 황금보검, 정밀 세공된 금 부장품등이 발견되고 있다.

▲울진군 죽변의 도시계획도로 부지에서 발굴된 7천500년전 신석기시대 목선의 파편(왼쪽)출토 현장과 보존 처리된 후의 모습.


신라의 조선술
지난 8월 삼한매장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09년 4월부터 2010년 4월까지 울진군 죽변면 등대 일원 도시계획도로 부지 내에서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7천500년전 신석기시대 목선(木船)과 노() 조각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울진의 목선 유물은 경남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됐던 환목선(丸木船)에 이어 두번째 세계최고 수준의 목선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전문가들은 또 소재는 단단한 녹나무로 만든 판재상의 목선편(板材狀木船)으로 추정되며 낚시(釣針) 축부(軸部, 몸체) 등의 유물 등과 동해안의 지형적인 여건 등을 감안할 때 목선을 이용한 어로행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북동해안에서 일찌기 발달한 조선(造船)의 역사는 비록 뭍에서 물놀이용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경주 임해전(臨海殿)에서 발굴된 목선으로 이어졌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백제의 조선술을 계승·발전시켜 조선술이 더욱 발전했다. 839년 일본 조정에서는 신라에서 큰 풍랑도 능히 견뎌내는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신라 배를 주문하도록 했다. 또 840년 기록에는 일본의 대마도사가 풍랑으로 한 해에 4번이나 조공 공물을 바다 속에 빠뜨리자 일본 조정이 가지고 있던 신라 배 6척 중 1척을 나눠줄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보아 신라 배는 우수한 기술로 일본에 여러 척 수출되기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장보고의 암살 후 신라의 동북아 제해권이 소멸된 것처럼 신라의 조선술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낮은 편이다. 하지만 최근식 교수는 신라의 해양사 연구를 통해 신라 무역선이 중국 선박을 모방했다는 인식에 반기를 들고 신라만의 독창적인 `신라선`형 범선이 엄연히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신라선`이 일본의 국가사업에도 사용됐다는 점에 주시한다.

대양항해에 적합한 첨저형(尖底型) 구조로 만들어진 것은 물론 유럽에서는 겨우 13세기 초에 나타났다는 선미타(船尾舵)라는 조타장치를 이 범선에 이미 설치했다는 것은 당시 조선술의 발달 정도를 그대로 보여 준다는 것. 무역선은 목적항으로 직항하여 항해 일수와 정박 일수를 줄이고 가동률을 높여야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데, 신무왕의 즉위 사실이 지방에까지 즉각 전달된 것이나 외국으로의 선박의 운항 일수가 오늘날의 정기선 운항 일수와 비슷하다는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신라무역선이 이미 직항로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학설이다.

엔닌도 `신라 배는 작지만 날렵하고 강하다. 또 동남풍과 서남풍을 이용해 남쪽으로 항해하는 역풍항해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포항 일대의 선박과 해운업
1924년 부산항 화물 중 전국 2위
동빈내항 일대 선박수리업 등 성업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복원해낸 신라배의 모습.
지난 7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포항의 동빈내항 일대 부둣가에서는 선미가 특이하게 둥근 모습에 흰색 페인트를 칠한 대형 목제 상선들이 물길을 거슬러 오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 수송선들은 당시 일본에 까지 드나든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사진 마저도 구해 볼 길이 없는 추억이 됐다.

포항시사에 따르면 포항항의 대일본 무역액은 1934년에 651만2천668원이었으며 주요 품목은 쌀과 사과, 방어, 전복, 대구, 청어 등 농수산품과 석탄, 비료 등이었다.

1924년 통계에 따르면 부산항에 출입하는 화물 중 포항 지방의 것이 마산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를 차지해 포항항이 경북의 관문이자 주요 무역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선박들은 지금처럼 터빈기관이 아닌 소구(燒球, hot bulb)기관, 이른바 `야끼다마`를 사용했다. 당시의 기술 수준에서 선박의 기관 고장이 잦았던 만큼 대형 선박들은 수리를 위해 동해안 각지에서 포항의 조선소까지 와야만 했다.

또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한 선박 관련 산업도 형성돼 일본에서 매입한 중고선들을 현해탄을 건너 몰고 와서는 낡은 기관을 수리해 멀쩡하게 둔갑시키는 몇몇 기관사들은 여러 선주들이 앞다퉈 모셔가느라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소구기관에서 터빈으로 넘어가는 선박기술을 습득하는 시기를 놓침으로써 어부나 일용직 건설노동자 등으로 사회계층이 강등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포항의 동빈동 일대 부둣가는 이들 조선소의 하청을 맡아 부품들을 전문 수리하는 이른바 `철공소`들이 밀집돼 호황을 누렸으며 아직도 일부가 남아 있다.

경북동해안은 강원도에 까지 명성을 날린 목제 어선 목수들이 이른바 `배를 모으(제작)며`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계원2리와 구룡포읍 병포리, 울진군 죽변항 일대에는 국내산 소나무나 일본산 수입 스기목을 재료로 하는 소형 조선소들이 오랜 기간 동안 성업했지만 이제는 연안 어업의 쇠퇴와 FRP 재질의 선박에 밀려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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