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동해안 곳곳 2천여년 전 동예인 삶의 자취 즐비
포항 흥곡리 일대 산에서 출토된 인장은 부족장 존재 징표
동예, 기원전에 동해안 일대 정착한 한민족 초기 고대국가

▲ 보물 560호 `인장`이 출토된 포항시 북구 신광면 흥곡리 일대 모습. (신광면사무소 촬영 협조)

이곳 경북 동해안이 부족국가를 일찍부터 형성했다는 실타래는 1966년 포항 북구 신광면 흥곡리에서 출토된 銅印(동인:인장)에서 출발한다. 지난 66년 누군가가 이곳 흥곡리에서 10여개의 유리구슬과 함께 인장을 발굴했다. 인장을 발견한 이사람은 서울 골동품가게에 이 것을 판 것으로 알려졌다. 도굴이었는지 주웠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발견한 곳도 분명치 않다. 흥곡리 일대 산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당시 주웠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해 하기 힘든 대목이다.

글 싣는 순서
<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

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
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
3)경북 동해안의 소국
4)동예인들의 후예
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
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
8)고래의 고장 영일만
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
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

□신광에서 출토된 인장의 숨은 비밀은?

아무튼 이곳에서 발견된 것 만으로 사료적 가치는 충분하다. 일찍부터 이곳은 부족국가가 형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동인은 지난 71년 보물 560호로 지정됐다. 크기는 印面(인면) 2.3×2.8㎝, 高(고) 2.5㎝이다. 중국 晋代(진대)의 官印(인장)으로, 晋率善穢伯長(진솔선예백장)의 글이 새겨져 있다. 진나라가 주변국가의 지배자(제국장)에게 권력을 승인하는 징표로 준 인장이다. 쉽게 설명하면 부족장이었다는 얘기다. 줍지않고 무덤에서 발견했다면 부족장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인장외에도 더 많은 것이 묻혀 있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무었이었을까.

진대는 265년-420년대로 위촉오로 대별되던 삼국시대를 통일했다.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배경은 157년이다. 연오랑세오녀 신화는 진대가 부흥하기 100년전에 탄생된 것을 알수 있다.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배경이되는 포항 남구 동해를 비롯한 북구 신광 등에는 분명 어떤형태든 부족국가 있었다는 얘기다. 부족국가가 없었다면 1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권력을 잡은 진나라가 인장을 줬을리 만무하다. 부족국가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은 아닐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 일대 부족국가는 기원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곳 경북동해안에는 오래된 문명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 이곳에 둥지를 튼 족속은 누구였을까. 신라와는 분명차별된다. 지금으로서는 동예인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동예는 이후 고구려 등의 침입으로 종족의 존재는 소멸되어갔지만. 예족의 삶의 자취들은 2천여년 동안 지워지지 않고 그들의 이주 지역이었던 동해안의 곳곳에 진하게 남아있다. 예족은 지금의 원산·안변 일대에서부터 경상북도 영덕(넓게는 포항까지 포함)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과 강원도 북부지방에 거주했던 고대 종족이었다.

▲ 포항시 북구 신광면 흥곡리에서 출토된 인장(보물 560호). 호암미술관 소장.

□동예는 고구려와 같은 족속(?)

예족의 활동에 대하여 우리가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있는 나라는 동예이다. 동예(東濊)는 기원전 3세기 이전~3세기경에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초기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시대는 철기 시대였다. 예(濊)라고 불렸으나, 넓은 의미의 예와 구별하기 위해 통상 `동예`라고 부르고 있다.

동예가 있었던 위치는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전반 무렵 동예는 북쪽으로 고구려·옥저(沃沮)와 접하고,남쪽으로 진한(辰韓)에 이어지며 서쪽으로는낙랑군(浪郡)과 접했다고 전하여 `조선의 땅`이라고 기술하였으니 오늘날의 동해안이다. 지금의 원산 부근인 안변(安邊)지방을 중심으로 중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 계열의 부족 사회로서, 옥저와 마찬가지로 나중에 한(後漢) 말에 고구려에 복속했다.

동예의 사회모습은 인구는 2만여 호(戶)에 혼인·장례 등의 풍속과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했으며, 의복은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동예인들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원산 부근인 안변(安邊)지방을 중심으로 중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 계열의 부족 사회로서,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의 군현으로 있다가 후한(後漢) 말에 고구려에 복속했다.

동예의 문화는공열(孔列)토기로 대표되는 무문토기문화이다. 주민은 옥저·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이며 언어·풍속도 거의 같았다. 중기 이후로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삼국지》<위지>(魏志)에 따르면, 호수(戶數)는 2만 정도이나 군주가 없었으며, 옥저의 삼로(三老)와 같이 중국 민족이 온 이래 후(侯)·읍장(邑長)·삼로(三老)의 관명을 사용하며 서민을 다스렸다.

□긴 창 사용, 보병전에 능해

특산물로는 단궁(檀弓), 문표(文豹), 나무 밑을 지나 갈 수 있는 키 3척의 말인 과하마(果下馬), 바다 표범의 가죽으로 알여진 반어피(班魚皮, 海豹皮), 명주(비단)와 삼베 등이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전하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 동예의 사회상을 보면, 산과 내(川)를 경계로 하여 구역이 나뉘어 있어 함부로 다른 읍락의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다. 이를 어겼을 경우 곧 벌책을 가해 생구(生口), 즉 노예나 소, 말 등으로 보상하게 했는데, 이를 일컬어 `책화(責禍)`라 하였다.

또 같은 성(姓)끼리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꺼리는 것이 많아 가족 중 한 사람이 질병으로 사망하면 곧 살던 집을 버리고 새 집으로 옮겨갔다. 또 호랑이를 섬겨 신으로 여겼다. 여기서 말하는 성이란 곧 씨족을 뜻하는 것으로, 족외혼(族外婚: exogamy)의 풍속을 말한다. 살인자는 죽였고, 도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주옥(珠玉)을 보물로 여기지 않았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밤낮으로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즐겼는데, 이 축제를 `무천(舞天)`이라 하였다. 동예인들은 긴 창을 만들어 사용했으므로 보병전에 능하였다.

다른 읍락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은, 곧 읍락 내의 사람이 그의 경작지를 다른 읍락인에게 양도하려고 할 때는 자신이 속한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러한 공유지의 존재와 경작지에 대한 읍락의 관할권은 읍락 전체의 공동체적 결속의 물질적인 토대가 되었던 것 같다.

족외혼의 풍속에 따른 혈족간의 유대와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는 등의 신앙 및 무천과 같은 공동의 축제와 의식(儀式)은 공동체적 유대를 강하게 지탱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예의 읍락에는 노예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사회분화가 크게 진전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병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곧 살던 집을 버린다는 것은 터부(taboo)에 따른 것이지만, 아울러 당시 동예인들의 집이 매우 소박한 것이었으며, 부(富)의 축적도 별로 많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동예의 호신신앙은 읍락 단위의 정기적인 제의로 시행되면서 읍락 내에 산재해 있던 공동체 구성원의 결속력을 강화하였는데, 집단적인 가무행위(歌舞行爲)는 제의과정의 한 부분으로 제의에 참여한 읍락민의 일체감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한족의 침략 남하는 시작되고

동예지역은 처음 위만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서기전 108년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 군현이 설치되자 동예의 북부지역이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는 동예인 들이 오늘날 경북 동해안 지역으로 남하 이주하는 일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대체로 2세기 후반 동예의 읍락들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의 동예지역 읍락에 대한 지배는 옥저의 그것과 동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읍락 내의 일은 족장으로 하여금 자치적으로 영위하게 하고, 족장을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예는 2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는데, 245년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 등이 동예를 공략하였다. 이 때 동예의 주요 읍락들이 위나라군에 유린되거나 투항하였다. 고구려가 위나라군에 수도가 함락되는 등의 패배를 당해 세력이 위축되자,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 아래 귀속되었다. 그 뒤 진(晉)나라의 쇠퇴와 함께 고구려가 낙랑군을 병합함에 따라 동예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강원도 지역의 동예는 여전히 고구려의 지배 밖에 있었는데, 광개토왕(廣開土王, 392~412)대에 정벌전이 감행되어 많은 촌락이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당시 고구려가 정복했던 일부 동예지역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강원도 남부 이남 동해안의 동예 촌락은 신라에 병합되었다. 광개토대왕릉 비문에서 보듯 예(濊)는 5세기 전반까지도 다른 종족과 구분되는 하나의 종족단위로서 존재하였다. 그 뒤 고구려와 신라가 지방제도를 정비하는 등 정복지역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영역 내의 지역간 교류가 증진되는 등의 정세진전에 따라 동예인은 고구려나 신라의 지방민으로 편제되어 점차 융합되었다. 그러나 종족의 존재는 소멸되어갔지만. 예족의 삶의 자취들은 2천여년 동안 지워지지 않고 그들의 이주 지역이었던 동해안의 곳곳에 진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영덕 영해 칠보산은 동예의 영역

동해안의 명산 백두대간의 원줄기 마지막 끝자락에 칠보산이 있는 곳 영해(寧海)는 예(濊)의 영역 일부 였다. 예족이 고구려에 정복됨으로써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 탈해왕23년(서기79년) 지방관리였던 거도(居道)가 군마의 마숙(馬叔) 놀이를 하다가 불시에 쳐서 신라의 영토로 만들어 복속케 하였다. 본래 우시국(于尸國)이란 이름으로 작은 소국가를 이루었는데 지금의 병곡면 병곡동 성곽이 있는 유지가 바로 그 자리라고 한다.

포항시 신광면 흥곡리( 출토 당시는 영일군 신광면 마조리)에서 출토된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 이 새겨진 동인(銅印)은 전면에 푸른 녹이 두껍게 덮여 있으며, 인장면(印章面) 외곽에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방형의 인장면 위로는 네 발이 표현되어 마치 원숭이의 모습과 같은 동물형태의 손잡이로 구성되었다.

손잡이의 세부형태를 살펴보면, 꼿꼿이 세운 얼굴에는 두 눈이 움푹 패었고, 입은 조금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리고 인장면을 밟고 있는 네 발 가운데, 앞발은 조금 움추린 듯 표현되었고, 이 앞발과 뒷발 사이의 허리 아래로는 공간을 두었다.

그리고 인장의 바닥면 `晋率善濊伯長`이라는 명문이 새겨져있어 이 도장이 중국 진대에 사용된 관인으로 추정된다. 이 도장들은 중국 한대(漢代) 이래 이웃 나라의 제국장(諸國長)에게 수여되었던 관인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1971년 12월 21일 보물 제560호 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이 동인이 가지는 외형적인 특징보다는 출토지를 통해서 조명되는 역사적 더 큰 의미는 예족의 분포 지역이다. 그 후예들이 경북 동해안 까지 광범위 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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