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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한 지 채 반년이 지나지 않은 1911년 정월 초닷새. 안동의 고성이씨 임청각 종가의 17대 종손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집안 누정인 군자정(君子亭)의 차디찬 마루바닥에 꼿꼿이 앉아 새벽을 맞았다. 이윽고 동녘으로 한 줄기 여명이 칠흑의 하늘을 가르자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몸을 일으켜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에 오른 석주는 조상의 신위 앞에 엎드려 마지막 인사를 올린 후, 위패를 감실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사당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삽을 들어 땅을 파고 위패를 묻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였지만, 나라가 망했는데 조상의 위패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내쳤다. 석주가 독립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길에 오르던 날 아침
기획ㆍ특집
등록일 2011.05.12
게재일 201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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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시내에서 순흥쪽으로 한적한 길을 달리다보면 맑은 시냇가에 울창한 소나무숲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개울 너머 일련의 고건물을 볼 수 있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이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은 1543년(중종 38) 이 지역 출신이자 고려말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처음 도입하여 한국 사상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회헌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아울러 유생교육을 겸할 목적으로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였다. 이곳은 안향이 어린 시절 공부를 했던 숙수사(宿水寺) 터이기도 했다. 이후 1548년(명종 3) 당시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이 참된 선비를 양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서원을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하여, 백운동서원에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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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1.05.05
게재일 201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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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국운의 쇠잔과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서서히 어둠과 고통의 터널로 빠져들고 있었다.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어 감에 따라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가 붕괴되고, 잦은 `서양 오랑캐`(洋夷)의 위협에 두려움은 높아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척의 세도정치와 지배계층의 권력 다툼은 정점으로 치달았고, 삼정의 문란과 이를 틈탄 벼슬아치들의 탐학, 잇단 기근과 질병의 창궐은 백성들을 깊은 도탄의 수렁으로 빠뜨렸다. 1811년 홍경래의 난 이래 끊이지 않던 민중봉기가 1862년에 이르러 진주민란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과 고통에 따른 몸부림이었다. 시대 도처에 넘쳐나는 고통과 모순은 경주 현곡 출생의 민감한 영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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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1.04.28
게재일 2011-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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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와 함께 조선후기의 학술사와 정치사를 양분했던 영남 퇴계학파는 내부적으로 두 갈래의 학맥으로 분화된다. 서애 류성룡을 계승하는 서애학맥과 학봉 김성일을 이어받는 학봉학맥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학봉계는 학봉에서 시작해 경당 장흥효-석계 이시명-갈암 이현일-밀암 이재-손재 남한조-대산 이상정-정재 유치명-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한다. 여기서 경당에서 갈암으로 이어지는 초기학맥은 일종의 가학(家學)적 연원관계를 이룸으로써 학봉학맥이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했다. 이 가학의 성격은 석계가 경당의 사위이고 갈암이 석계의 아들이라는, 초기계보 사이에 존재하는 혈연적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이 계보는 자연스럽게 이 관계를 연결시키는 한 여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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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1.04.21
게재일 201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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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종전을 향해 막바지로 치닫던 1598년 11월19일, 7년여 전쟁 기간 동안 만 5년을 영의정으로 봉직하면서 전쟁을 진두지휘하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파직되었다. 공교롭게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정읍현감으로 있다가 서애에 의해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어 전쟁 기간 내내 조국의 바다를 지켜냈던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일본군 전함 300여척을 격파하고 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며 전사한 바로 그날이었다. 서애의 파직은 정치적 반대파의 탄핵이 빌미였다. 종전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반대파들은 서애가 국정을 책임지는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잘못 이끌었다고 비판하였다. 서애의 공을 거론하며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였던 선조도 거듭된 탄핵에 마침내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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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1.04.14
게재일 201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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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읍에서 옛 36번 국도를 따라 영주 방향으로 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촌초등학교 앞에 이른다. 이곳을 지나면 바로 ‘낙화암천’이라는, 사연이 있음 직한 이름을 지닌 개천을 만나는데, 이 개천을 건너자마자 우회전해 올라가면 사제마을이라는 곳이 나온다. 조선 초기부터 550여 년 세월을 이어온 우계 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을 들어서면 입구에 입향조를 모신 도계서원이 방문객을 맞는다. 사당과 강당 그리고 관리 채인 고직사로 이루어진 단출한 구도의 서원이다. 그런데 사당과 별도의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는 강당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구도의 그런 단조로움을 일거에 깨뜨리는 기이한 모양의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정면 1칸에 측면 2칸 반, 옆으로 길쭉한 구조로 되어 있는 이 건물은 동남향으로 배치된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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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1.03.31
게재일 201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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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종가문화의 역사는 조선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이 건국되자 당시의 정치적 격랑을 피해 중앙의 관료들이 사직이나 실각 등의 형태로 벼슬에서 물러난 후, 연고를 좇아 새로운 보금자리로 낙향하여 이른바 입향조(入鄕祖)로 속속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그 출발점이다. 이어 주자성리학이 성숙기로 접어드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그렇게 뿌리 내린 세족 가문에서 불천위로 추대되는 인물들이 하나둘 나타나면서 본격적으로 종가문화가 형성된다. 하지만 짧다면 짧은 종가문화의 역사 속에서도 가진 자의 사회적 책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종가는 많다. 그 가운데 특히 한두 대가 아니라 누대에 걸쳐 우리 종가문화의 품격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가문으로 경주 최부자집이 있다. 최부자집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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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1.03.24
게재일 201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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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日, 하루하루를 아끼고 사랑한다!”. 이현보(李賢輔·호는 巖, 1467~1555)가 일흔을 넘긴 아버지가 점점 늙어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했던 말이다. 늙으신 부모에게 효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면서 아낀다는 뜻이다. 농암은 이런 심정으로 1512년(중종 7) 나이 46세 되던 해에 고향인 분강 기슭의 귀먹바위(巖) 위에 정자를 세우고는 `애일당(愛日堂)`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농암은 안동 예안에서 영천이씨 이흠(李欽)의 아들로 태어났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 밀양부사와 안동부사 등을 지냈으며, 1523년 성주목사로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후 동부승지와 부제학 등을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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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1.03.17
게재일 201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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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 62세의 노학자 한강 정구(1543~1620)는 수도산 청암사 근처에 젊을 때부터 소원했던 초가삼간 집 한 채를 지었다. 정구는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젊을 때부터 학문적인 명망이 매우 커서 많은 제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던 학자였다. 그리고 젊을 때부터 벼슬길에 뜻이 없어 과거를 치르지 않았으나 36세 때인 1578년 사포서(司圃署) 사포(司圃)로 임명된 이후 끊임없이 벼슬에 취임하라는 정부의 요청으로 인해 강원도관찰사,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어 뜻하지 않은 벼슬길에 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승들을 본받아 자연에 돌아가 학문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스승인 조식의 경우 지리산을 사랑했고, 이황은 청량산을 사랑했듯이 정구는 가야산과 수도산으로 이어지는 무흘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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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1.03.10
게재일 201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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