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日, 하루하루를 아끼고 사랑한다!”. 이현보(李賢輔·호는 巖, 1467~1555)가 일흔을 넘긴 아버지가 점점 늙어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했던 말이다. 늙으신 부모에게 효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면서 아낀다는 뜻이다. 농암은 이런 심정으로 1512년(중종 7) 나이 46세 되던 해에 고향인 분강 기슭의 귀먹바위(巖) 위에 정자를 세우고는 `애일당(愛日堂)`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농암은 안동 예안에서 영천이씨 이흠(李欽)의 아들로 태어났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 밀양부사와 안동부사 등을 지냈으며, 1523년 성주목사로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후 동부승지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과 경주부윤을 비롯하여 경상도관찰사·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와서 만년을 강호에 묻혀 보내다가 삶을 마감하였다. 농암은 자연을 노래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어부가`,`효빈가(孝嚬歌)`,`농암가`,`생일가(生日歌)`등이 있다.

농암은 소문난 효자였다. 실제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효절(孝節)`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은 농암이 유일한데, `자혜애친(慈惠愛親)을 효(孝), 호염자극(好廉自克)을 절(節)`이라고 한 데에 유래한다. 농암은 벼슬살이로 타지에 나가있을 때도 오직 고향에 계신 부모 걱정뿐이었다. 그러다가 1508년 가을, 가까이서 부모를 모시고 싶다는 생각에서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경북 영천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교통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인지라 고향 분천汾川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럼에도 부모를 찾아뵙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 달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512년, 늙으신 부모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애일당을 세웠던 것이다.

1533년, 농암은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와서 아버지를 비롯하여 고을 어른들을 모시고 애일당에서 잔치를 열었다. 당시 농암의 아버지가 94세였고 나머지 여덟 분 역시 80세를 넘긴 노인들이었는데, 아홉 분이 애일당에 모였다고 해서 모임의 명칭을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고 하였다. 농암은 `구로회`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고향에는 늙은이가 많다. 1533년 가을, 내가 홍문관 부제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와 수연을 베푸니 선친의 연세가 94세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예전에 부모님이 모두 계실 때 이웃을 초대하여 술잔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적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지금은 선친만 계시는지라 아버지와 동년배인 80세 이상의 노인을 초대하니 무릇 여덟 분이다. 마침 향산고사(香山故事)에 `구로회`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백발노인들이 구부리거나 앉거나 편하신 대로 있으니 진실로 좋은 모임일래라. 이런 연유로 `구로회`를 열고 자제들에게 이 사실을 적게 한다.

당시 농암은 이미 7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들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웬만한 효심이 아니고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는 10여 년 전인 1519년 9월 9일 중구일에도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약 수백 명의 80세 이상 노인을 초청하여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이라는 잔치를 열었던 적이 있다. 특히 그날 잔치에는 여자와 천민도 자리를 함께 했는데, 엄격한 신분제사회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참으로 파격적 모임이라 할 수 있다. 농암의 이런 성품은 “집안에서 자제와 노비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사도 문벌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접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는 퇴계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애일당구로회`는 수백 년을 이어오는 농암 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그런데 모임을 가질 때마다 애일당속구로회(愛日堂續九老會), 용수사속로회(龍壽寺續老會), 애일당기로회(愛日堂耆老會), 대사장속로회(大寺場續老會), 애일당속로회(愛日堂續老會), 부라원백발회(浮羅院白髮會), 부라원속로회(浮羅院續老會), 애일당완월(愛日堂玩月), 용수사속구로회(龍壽寺續九老會), 송정속백발회(松亭續白髮會), 애일당속로회(愛日堂續老會), 긍구당우회(肯構堂友會) 등으로 이름이 달라졌는데, “회원이 점점 많아져서 `구로(九老)`라는 명칭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모임을 가질 때 적게는 9명 많게는 35명까지, 인원수의 차이가 있었다.

농암의 후배인 퇴계 이황(1501~1570)도 70세가 되던 1569년 가을 모임부터 참석했는데, 이때의 명칭은 `애일당속로회`였다. 또 1585년에는 영천군수 권춘란(호는 晦谷, 1539~1617)의 송별회를 겸하기 위해 장소를 대사장(大寺場)으로 옮겼다고 적혀있으며, 1602년에는 “오천의 상민(常民)이 참석했는데, 101세이다”라는 흥미로운 기록도 보인다. 그러다가 1902년에 열린 모임에는 37명이 참석하였고, 모인 사람들의 연령이 합계 2561세였다. 이후 `구로회`는 1940년대까지 이어오다가 아쉽게도 중단되었다. 지금으로부터 5백여 년 전 94세의 아버지 앞에서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던 농암의 효심이 분강 기슭에서 되살아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미영(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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