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4년 62세의 노학자 한강 정구(1543~1620)는 수도산 청암사 근처에 젊을 때부터 소원했던 초가삼간 집 한 채를 지었다. 정구는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젊을 때부터 학문적인 명망이 매우 커서 많은 제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던 학자였다. 그리고 젊을 때부터 벼슬길에 뜻이 없어 과거를 치르지 않았으나 36세 때인 1578년 사포서(司圃署) 사포(司圃)로 임명된 이후 끊임없이 벼슬에 취임하라는 정부의 요청으로 인해 강원도관찰사,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어 뜻하지 않은 벼슬길에 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승들을 본받아 자연에 돌아가 학문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스승인 조식의 경우 지리산을 사랑했고, 이황은 청량산을 사랑했듯이 정구는 가야산과 수도산으로 이어지는 무흘동천을 매우 사랑했다. 이제 노년에 접어들어 그 자신의 은거지로 택한 곳이 무흘동천 안의 무흘정사였다. 무흘정사를 짓고 난 후 정구는 모든 손님을 사양하고 자신의 공부에만 집중하겠다고 다짐하고 다음과 같은 두 편의 시를 읊었다.

산봉우리 지는 달 차가운 시냇가에 어리는데

나 홀로 앉아 있노라니 밤기운 싸늘하네

벗들을 사양하노니 찾아올 생각말게

어지러운 구름 쌓인 눈에 오솔길 묻혔나니

내 스스로 궁벽한 산 속에 숨어

세상과 길이 작별하였네

그림자 지우고 자취도 끊고

남은 세월 여기서 보낼거나

이전에 거처하던 회연초당 백매원(지금의 회연서원이다)에서 무흘정사로 옮긴 것은 당시 그가 평생 존경하고 모범으로 삼았던 주희를 본받아 번잡한 세속과 이별하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만 전념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희가 무이계곡을 사랑하여 `무이도가`를 짓고 산수를 노래하고, 그 안에 무이정사를 지어 학문에만 전념한 것을 본받아 자신이 사랑하던 무흘계곡을 무이구곡과 동일시하고 주자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던 것이다.

한편 정구가 무흘계곡으로 완전히 은거를 결심하게 된 것은 또 다른 사정이 있었다. 남명 조식문하의 동문이었던 내암 정인홍(1536~1623)과의 갈등도 은거를 재촉한 또 다른 이유였다. 바로 전해 스승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정인홍과 불화를 겪었고, 절친한 친구였던 동강 김우옹(1540~1603)의 영전에 올린 만사가 정인홍의 불만을 사 급기야 의절하다시피 하였다. 젊을 때 가야산에 같이 올라가 학문에 대해 토론하던 벗으로부터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비난까지 듣게 되자 이제 세속의 모든 인연을 피해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구는 천상 학자였다. 무흘정사를 지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집에서 무흘정사까지 왕래할 때도 책 한권을 들고 쉴 때마다 읽었다. 그러므로 은거를 위해 지었던 무흘정사는 자신의 학문을 위한 도서관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정구는 자신이 소장하던 모든 책들을 무흘정사에 옮겨놓고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등 수많은 저작을 함으로써 왕성한 저술활동을 벌였다. 1606년과 1607년 잠시 안동부사와 대사헌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무흘계곡의 자연을 벗 삼아 자신의 공부와 제자 교육에만 집중한 행복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1611년 고향사람인 박이립이 일으킨 소동으로 인하여 그가 사랑한 무흘계곡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정구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 일어났던 임해군 사사에 대한 논의에서 임해군의 생명은 살려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서 집권층의 미움을 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이립은 정구가 국왕에 대하여 불경한 말을 했다고 고발하여 늙은 몸으로 관청에 나가 석고대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사건은 국왕인 광해군이 문제 삼지 않음으로써 화를 면하게는 됐으나 이제 성주 땅은 더 이상 있기 싫은 땅이 되었다. 결국 그는 2년 뒤인 1613년 고향을 떠나 칠곡의 노곡(지금의 칠곡군 왜관읍 금곡리 노실)으로 옮겨 갔고, 이후 다시는 그가 사랑한 무흘정사로 돌아오지 못하고 1620년 타관 땅인 대구의 사양(지금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에서 임종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흘계곡은 이후 한강의 문인들에게는 스승이 자신의 학문을 완성한 성지였다. 그러므로 무흘계곡은 제자들에 의해 꾸준히 관리되고 또 스승의 학문을 추억하는 장소로 발전해 나갔다. 무흘계곡은 회연서원이 있는 성주군 수륜면에서 가천면, 금수면을 거쳐 김천시 증산면까지 대가천을 따라 22km에 달하는 긴 계곡이었다. 제자들은 대가천을 따라 곳곳에 정구를 추모하는 건물을 짓고 기념하였다. 스승이 젊었을 때 학문에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봉비암 아래의 회연초당은 제자인 배상룡 등의 노력으로 회연서원으로 발전하여 정구의 위패를 모셨고, 무흘정사는 제자들이 스승을 추억하기 위하여 빈번히 찾는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비록 스승은 세상을 떠났으나 스승이 사랑한 자연은 남아 후세의 학자들에 의하여 무흘구곡으로 명명되었다.

무흘 구곡의 제 1곡은 봉비암(성주군 수륜면 신정동)으로 바위 아래 회연서원이 있고, 2곡은 한강대(성주군 수륜면 수성동)로 한강정사가 있던 곳이었다. 3곡은 무학정(성주군 금수면 무학정), 4곡은 선바위(성주군 금수면 영천동), 5곡은 사인암(성주군 금수면 영천동)으로 한강이 거닐며 학문은 연찬하던 곳이며 모두 성주에 있다. 6곡은 옥류동(김천시 증산면 유성리)으로 무흘정사 인근의 계곡이며 제 7곡이 만월담으로 정구가 자신의 학문을 완성한 무흘정사가 있던 곳이었다. 제8곡은 와룡암(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9곡은 용추(김천시 증산면 수도리)로 1784년 김상진(1705~?)이 그림으로 그린 `무흘구곡도`가 지금도 남아 있어 자연을 통해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던 한강학파의 자연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김형수(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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