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파와 함께 조선후기의 학술사와 정치사를 양분했던 영남 퇴계학파는 내부적으로 두 갈래의 학맥으로 분화된다.

서애 류성룡을 계승하는 서애학맥과 학봉 김성일을 이어받는 학봉학맥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학봉계는 학봉에서 시작해 경당 장흥효-석계 이시명-갈암 이현일-밀암 이재-손재 남한조-대산 이상정-정재 유치명-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한다. 여기서 경당에서 갈암으로 이어지는 초기학맥은 일종의 가학(家學)적 연원관계를 이룸으로써 학봉학맥이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했다.

이 가학의 성격은 석계가 경당의 사위이고 갈암이 석계의 아들이라는, 초기계보 사이에 존재하는 혈연적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이 계보는 자연스럽게 이 관계를 연결시키는 한 여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그 여인을 매개로 경당은 아버지이고 석계는 남편이며, 갈암은 아들인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남 퇴계학파의 중심적인 줄기 가운데 하나인 학봉학맥의 초석 형성사의 숨은 주역, 그가 바로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이다.

정부인의 이름은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이다.

`정부인`은 아들인 갈암이 뒤에 이조판서를 역임함으로써 추증받은 품계이다.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인 1958년 11월 지금의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경당 장흥효와 안동권씨 사이에서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났다.

경당은 영남 퇴계학파의 초기학맥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통상 퇴계문하의 고제로 월천 조목과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그리고 한강 정구 네 사람을 꼽는다. 경당은 이들 가운데 월천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에게 모두 배움으로써 퇴계학의 적통을 이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호를 퇴계철학의 중심개념인 `경(敬)`에서 따와 `경당(敬堂)`이라 한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정부인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학문과 덕성에 대한 소양을 익혔다. 한 번은 경당이 제자들에게 중국 송나라의 사상가 소강절이 주장한 천지자연의 변화원리인 원회운세(元會運勢)의 이치에 대해 말하였으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부인이 그 수치를 정확히 계산해 대답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정부인은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도 남다른 성취를 보여 아들을 군대에 보낸 이웃집 노파의 애끓는 모정을 읊은 학발시(鶴髮詩)를 비롯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의 소중함을 노래한 경신음(敬身吟), 보슬비의 운치를 운율감 있게 노래한 소소음(蕭蕭吟), 성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노래한 성인음(聖人吟) 등의 시를 남겼다.

이 가운데 성인음은 다음에서 보듯이 마치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뵈”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 퇴계의 도산십이곡 가운데 제9곡을 연상시킬 정도로 성인의 자취를 배우고자 하는 여군자(女君子)의 열의를 엿보인다.

성인의 때에 태어나지 못해

성인의 모습 뵙진 못했으나

성인의 말씀은 들을 수 있으니

성인의 마음씀은 족히 알겠네

정부인은 19세 되던 해인 1617년 영해 나랏골에 살던 8살 위인 석계 이시명에게 시집을 갔다. 당시 석계는 이태 전 부인을 사별하고 슬하에 1남 1녀를 둔 상태였다. 때문에 정부인으로서는 석계와의 결혼이 받아들이기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정부인은 결혼 후 전부인의 소생을 친자식보다 더 살뜰히 키워 여섯 살이던 아들 상일을 매일 5리나 떨어져 있는 선생의 집에 업고 다니며 글을 가르쳤고, 나중에 자신의 소생들이 무엇을 물어오면 반드시 형에게 물어보게 함으로써 집안의 위계를 세웠다. 나랏골 재령이씨 충효당 가문을 연 시아버지 운악(雲嶽) 이함(李涵)이 이를 보고 자신의 손자는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니고 죽은 어미가 살아온 것이라고 이웃들에게 말했을 정도였다.

전 부인 소생을 포함해 정부인은 슬하에 모두 7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웠는데, 그 가운데 둘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셋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넷째 항재(恒齋) 이숭일(李崇逸)은 학문적으로도 큰 성취를 이루어 영남 퇴계학맥의 중심인물들로 활약하였다.

특히 갈암은 영남남인의 영수로서 당시 정적 관계에 있던 서인을 상대로 정국을 주도함으로써 영남학파의 정치적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갈암은 정부인의 생애를 기록한 글에서 어머니는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고, 60년 가까이 아버지와 살면서 늘 받들어 공경하고 서로 대하기를 손님과 같이 하였으며 매사를 반드시 아버지께 여쭌 뒤에 행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정부인은 이처럼 시집살이를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친정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시집 온 후 1년에 한 번은 문안을 갔고 어머니와 사별한 후 아버지 경당 선생이 재혼해 3남 1녀를 두고 돌아가시자 어린 동생들과 계모를 아예 시집 인근으로 이주시켜 보살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주도 모셔와 제사를 거르게 하지 않음으로써 친정의 가계가 보존되도록 힘을 기울였다.

정부인의 부덕(婦德)은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라는 책자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정부인이 노년에 자신의 살림지혜를 종합하여 모두 146종의 음식조리법을 소개한 것으로, 영남 양반가의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런데 이 책 속에는 영남 양반가의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전통이 스며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음식디미방`과 함께 영남 양반가의 음식문화를 오늘까지 전하는 대표적인 조리서로 `수운잡방(需雲雜方)`이 있다. 안동 예안에 세거하던 광삼김씨 예안파의 김유(綏)가 지은 것인데, 석계의 첫 부인이 바로 이 김유의 증손녀이다. 따라서 `음식디미방` 속에는 정부인의 친정인 안동장씨 경당문중과 시집인 재령이씨 충효당 그리고 광산김씨 예안파 이 세 가문의 음식문화가 고스란히 집대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야말로 영남의 음식문화를 오늘까지 전하는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박원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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