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 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
(20) 지난했던 삼국통일의 과정과 그 이후

세상 모든 국민들은 전쟁보다 문화·예술의 발전을 반긴다. 태평성대를 누리는 민초들의 모습을 그렸다. /삽화 이건욱

서기 676년. 신라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병합한 후, ‘7세기 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불렸던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정치와 군사적인 면, 종교·문화적인 측면 등에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묶어 통일왕국을 만들어간 과정은 드라마틱하면서 지난했다.

탁월한 외교협상력을 발휘했던 무열왕 김춘추,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의 면모를 두루 갖춘 김유신, 무열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침공과 당나라 격퇴의 선두에 섰던 문무왕 김법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나라를 위해 바치겠다고 맹세한 젊은 화랑들…. 이들 모두는 삼한일통의 주역이었다.

 

신라, 백제에 이어 고구려 병합 ‘7세기 亞 초강대국’ 당나라까지 축출… 삼국통일 여정 마침표

이후 전쟁과 전투에 사용됐던 국력을 문화와 예술에 투자… ‘빛나는 불교예술 왕국’으로 성장

◆신라, 백제·고구려·당나라를 차례대로 무릎 꿇리다

660년. 의자왕이 가장 신뢰했던 백제의 명장 계백이 5천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지금의 충남 논산 일대)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백제의 붕괴가 현실로 닥친 것이다. ‘삼한일통’이라는 정치적 명분과 함께 신라 무열왕에겐 사적인 원한도 있었다.

‘황산벌전투’를 ‘딸과 사위를 죽인 의자왕을 향한 무열왕 김춘추의 복수극’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건 아래와 같은 이유다.

전북대학교 박노석 교수의 논문 ‘백제 황산벌전투와 멸망 과정의 재조명’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삼국사기-신라본기’ 등의 기록을 검토해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초기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영특한 군주였다. 재위 2년(642년)에는 직접 신라를 공격해 미후(<737C><7334>) 등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공격해 점령하게 했다. 당시 대야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品釋·아내는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이었는데, 윤충은 품석 부부가 항복을 하자 이들을 죽여 머리를 도성으로 보냈다. 이때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고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아버지 무열왕이 백제를 병합한 1년 후 세상을 뜨자, 연이어 고구려 병합의 길에 나선 건 아들 문무왕 김법민이었다.

고구려는 멸망 2년 전인 666년부터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었다. 카리스마 넘쳤던 ‘탁월한 고구려의 전략가’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과 세 아들 사이에서 정권을 제 앞으로 가져다놓기 위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벌어졌다.

서울교육대학교 임기환 교수의 논문 ‘고구려 멸망기 신라의 군사 활동’은 고구려 붕괴의 전조(前兆)와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 상황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666년 6월 남생(연개소문의 아들 중 한 명)이 당으로 투항하면서 시작된 고구려에 대한 당(唐)의 공세는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2년 여에 걸쳐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667년부터 당군은 신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구하고, 신라가 고구려 남부 전선을 압박하면서 결국 668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신라는 당과 함께 승전국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 멸망 후 당은 신라의 공훈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백제 멸망 이후 당과 신라 사이에 내재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 공격을 목표로 연합군을 구성했던 당과 신라는 백제 멸망 후 전후 처리과정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냈고, 고구려에 대한 공세 과정에서도 이러한 양국의 입장은 잠재되어 있었다.”

평양성전투에서 거칠기로 이름 높은 고구려 군대는 굴복시켰으나,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또 하나 신라의 적’ 당나라의 야심은 깊고도 은밀했으며 동시에 컸다.

통일된 삼한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시시때때로 드러낸 당나라. 신라에겐 백제와 고구려보다 더 강하고 위험한 적을 몰아내야 할 숙제가 남았다.

백제·고구려 병합 과정에서 일등공신으로 역할 했던 김유신은 당시 일흔을 넘긴 노장(老將)이었음에도 수많은 전투 경험을 토대로 조카인 문무왕 김법민을 조력하며 당나라 축출에 앞장선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길고 길었던 싸움 끝에 676년 당나라 군대가 신라 땅에서 철수한다.

‘나무위키’는 ‘나당 전쟁(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의 시각과 끝을 아래처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서기 670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 연합의 요동 선제공격으로 시작돼 676년 기벌포 전투까지 7년간 진행된 신라와 당 사이의 전쟁. 여기서 신라가 승리해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확보했던 옛 백제, 고구려 영토를 잃어버리고 신라가 한반도를 지배하게 된다.”

 

통일신라의 예술적 수준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표적 건축물 동궁과 월지. /이용선기자
통일신라의 예술적 수준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표적 건축물 동궁과 월지. /이용선기자

◆ ‘삼한일통’의 두 주역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모두 20회로 연재된 2023년 연중기획의 타이틀은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다. 이는 ‘삼국통일’과 두 인물이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라는 의미일 터. 실제로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삼한일통을 최선두에서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김유신의 경우 보통의 사람들은 빼어난 군사적 역량을 가진 장수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군사전략에만 밝은 무장(武將)이 아니었다. 충남대학교 김수태 교수의 논문 ‘신라의 삼국통일과 김유신’ 한 대목을 읽어보자.

“7세기 후반 백제의 멸망 이후 전개된 신라-당나라 관계에서 김유신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문무왕이 고구려의 멸망 직후 신하들에게 김유신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돼 그 공적이 많았다’고 언급했듯이 그가 재상으로서나 장군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잘 수행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그 모두를 서로 연결시키면서 활동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문무(文武)가 동시에 밝았던 김유신을 손위 처남으로 둔 무열왕 김춘추는 신라는 물론, 백제·고구려·당나라를 통틀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치협상력과 외교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호랑이 등에 달린 날개’로 역할하며 삼국통일을 견인해낸다. 이는 이후 왕조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벤치마킹(Bench-marking)된다.

이와 관련해 명지대학교 남재철 교수의 논문 ‘한문학을 통해 되돌아보는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역사2’를 인용한다.

“조선조 지식인들은 태종 무열왕이나 문무왕이 김유신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군신 간에 화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한통일의 대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보았다.”

◆ 화려한 불교예술 꽃 피운 문화왕국 통일신라

7세기 말에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는 ‘빛나는 불교예술 왕국’으로 성장한다. 전쟁과 전투에 사용됐던 국력을 문화·예술에 투자함으로써 동서양 어떤 고대 국가도 흉내 내기 힘든 ‘문화왕국’을 만들어갔던 것.

그 생생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동궁과 월지’, 그리고 ‘감은사’다. 현대에 들어서며 그곳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불리게 했고, ‘불교예술의 절정 속에 서있던 왕조’로 인식되게 했다. 다음은 ‘위키백과’의 설명이다.

“월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황룡사 서남쪽에 조성됐다. 큰 연못 가운데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무산(巫山)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을 만들었다. 이것은 동양의 신선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섬과 봉우리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의 원지(苑池)다. 5년 후인 679년에는 별궁인 동궁을 건축한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후 짓기 시작해 그의 아들인 신문왕 김정명이 즉위 직후에 완공한 사찰이다. ‘쌍둥이 석탑’으로 유명한 이곳에서도 여러 점의 진귀하고 화려한 신라 불교예술품이 발견돼 역사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으로부터 1천347년 전 이뤄진 삼국통일. 그 과정과 통일 이후 신라의 변화·발전 과정을 공부해보는 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21세기 경주를 보다 밀도 높게 이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끝)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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