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삼한일통 일등공신’ 화랑들의 광영과 비극

통일신라를 만든 일등공신 ‘화랑’의 보편적 모습을 상상해 그렸다. /삽화 이건욱

화랑(花郞).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꽃 같은 사내’라는 뜻이다. 신라는 전략적으로 외모와 품성 모두가 빼어난 소년(청년)을 뽑아 나라의 지도자로 키웠다.

삼한일통(삼국통일)에 이르기 위한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전쟁과 전투가 끝없이 이어지던 7세기. 신라 화랑들은 그 명칭처럼 ‘꽃’이 아닌 매서운 ‘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경우가 더 많았다.

신라가 통일왕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두 사람, 즉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역시 젊은 시절엔 주목받는 화랑의 우두머리였다.

660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제와 맞붙었던 ‘황산벌전투’에서 1천400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인상적인 일화를 남긴 신라 청년 반굴과 관창 또한 화랑.

그렇다면 화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이었을까? ‘나무위키’는 “고대 신라에 있었던 소년들로 이루어진 심신 수련 및 교육단체다. 주된 목적이 심신 수련이지만 사실 창설 초기부터 관리와 군인 양성의 제도로 역할했다. 소년뿐 아니라 젊은 청년들도 많았다. 실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으므로, 사실상 국가가 운영하며 주도한 소년병 제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강제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화랑들끼리 주도해 전쟁에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위키백과’는 화랑의 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외모·품성 빼어난 신라소년 ‘화랑’
통일왕국 지도자·군인으로 키워
김춘추·김유신도 화랑 국선 출신
용맹하고 총명함으로 명성 자자

삼한일통 위한 전쟁 이어졌던 7세기
역사학자, 신라화랑 200~300명 추정
관창·반굴 등 10·20대 전사자 수두룩
대의명분 앞 거룩한 순국…이름 남겨

“민간 청소년단체로서의 화랑도는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576년 이후 신라의 국방 정책과 관련해 이를 신라의 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조직이 체계화됐으며, 이들 화랑의 총지도자인 국선(國仙)을 두고 화랑의 예하도 수개 문호(門戶)로 구성하게 했다. 화랑의 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l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화랑 낭도는 수백에서 수천 명을 헤아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춘추와 김유신은 ‘국선’ 출신이다. 김유신이 이끌던 화랑의 무리는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는데, 리더인 김유신은 물론 따르는 낭도들까지 용맹과 총명함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 군사정권은 ‘화랑정신’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10대와 20대 초반 청년들은 피가 뜨겁다.

‘나라를 위해 내 한 목숨 바친다’는 대의명분(大義名分)만 있다면 싸움에 나서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지사 당나라, 고구려, 백제와의 전투에서 선봉에 섰던 화랑들 중에는 요절(夭折)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10대 소년 화랑 관창이 대표적이다.

신라의 통치자 입장에서는 거룩한 순국(殉國)이었다.

이런 화랑의 전통은 현대로 들어서면서 군사독재정권 시절엔 교묘하게 악용(?)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최광식의 논문 ‘新羅의 花郞徒와 風流道(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의 관련 대목을 아래 인용한다.

“화랑도는 군사단, 가무집단, 종교 제사집단, 인재 양성과 선발을 위한 수련집단의 성격 등 여러 가지 복합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戰士團(전사단)과 군사적 집회의 성격이 강조돼 왔는데, 이는 일제 시기 식민사학자들의 연구 경향을 답습한데서 기인한다고 보인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군사정권 시기에 군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조국 통일의 역군으로서 신라 화랑도의 후예임을 강조해 통일의 역군으로 삼고자한 데도 그 요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일부분에 있어선 비판적 태도를 취했지만 최광식 명예교수 역시 “신라시대에 활동했던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지도이념이었던 풍류도(風流道)는 신라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는 말로 화랑과 그들이 품었던 지향을 높이 평가한다.
 

경주 황성공원 김유신 동상 아래엔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를 형상화 한 부조(浮彫)가 있다. /사진 이용선기자
경주 황성공원 김유신 동상 아래엔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를 형상화 한 부조(浮彫)가 있다. /사진 이용선기자

◆화랑 김유신은 무(武)로, 화랑 김춘추는 문(文)으로 이름 떨쳐

화랑도를 포함한 세상 어떤 ‘조직’도 다를 바 없다. 조직을 기반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직의 규율과 강제 속에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들도 많다.

‘화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최고의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고, 1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이름을 경향각처에 화인(火印)처럼 새긴 대표적 인물이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이다.

한 사람은 신라의 지존(至尊)인 왕(무열왕 김춘추)이 됐고, 나머지 한 사람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겸 정무수석(태대각간 김유신)이 됐다. 그중 김유신은 화랑 역사에 대표적 무인(武人)으로 길이 남았다. 영남대학교 객원교수 이영찬의 논문 ‘김유신의 군인정신과 리더십 연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김유신(595∼673)은 신라의 무신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5세가 되던 해 화랑으로 낭도를 이끌고 수련하다가 신라군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최초로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이후 압량주 군주로서 백제군을 격퇴하고 통일 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우는 등 신라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침략하려 하자 그는 군사를 지휘하며 지도자적 임무를 수행했다. 이순신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오는 왜적을 물리쳤다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를 물리쳐 명실상부 자주독립의 국가를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긴 부연이 필요 없다. 학자가 한 사람을 향해 이같은 최상급의 칭찬을 내놓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실상 김유신은 샤머니즘 차원에선 중국 초나라의 항우(項羽·기원전 232~202)처럼 무신(武臣·무관인 신하)이 아닌, 무신(武神·신의 반열에 오른 무관)으로까지 추앙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라 화랑 중 ‘문(文)’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이는 누굴까? 맞다. 모두가 예상했듯 후에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다. 빼어난 문장에 더해 김춘추는 해사한 외모로도 주목받았다.

21세기 한국의 몇몇 영화배우와 보이 밴드 멤버는 이웃나라에서까지 인기를 누린다. 잘생긴 얼굴로. 1천400여 년 전 김춘추도 그랬다. 현재의 중국을 통치했던 당나라의 고위 관료와 귀족 부인들은 멀리 신라에서 온 김춘추가 지닌 헌헌장부(軒軒丈夫)의 풍모에 매료당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청년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누린 인기가 어떠했는지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김춘추가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 당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당나라 황제가 그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게 해 사위로 삼으려 했지만 김춘추는 이를 사양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당시 신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일본에서조차 ‘꽃 같은 사내’ 화랑 김춘추의 매력을 “신라가 상신 대아찬 김춘추를 사신으로 보내왔다.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 능력이 있었다”고 쓴다. 647년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반굴과 관창같이 안타깝게 허리가 꺾인 화랑도 적지 않아

김춘추와 김유신처럼 젊은 시절엔 화랑의 리더로 주목받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권좌에 앉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10대 혹은, 20대 어린 나이에 전장(戰場)에서 숨진 화랑도 적지 않다.

역사학자들은 신라시대 전체를 통틀어 화랑의 숫자를 200~300명으로 추정한다. 그중 절반 이상이 하늘이 내린 자신의 명(命)대로 살지 못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반굴과 관창도 그들 중 하나다.

‘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전술적 차원에서 희생된 둘 중 관창은 사망 당시 나이가 겨우 16세. 요즘의 중학교 3학년 또래 소년이었다.

반굴 또한 갓 아들을 낳은 20대 초반 청년이었다. 김유신의 조카이기도 했던 반굴을 향해 그의 아버지 김흠순(김유신의 동생)은 “오늘 나라를 위해 죽어, 영원토록 이름을 남기라”고 아들의 죽음을 부추긴다.

황산벌전투를 소재로 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선 이 모습이 희화화 돼 그려진다.

기자는 이 장면이 너무나 슬펐다. 아무리 그럴듯한 대의와 명분 앞이라도 ‘인간’ 반굴과 관창에게 두려움과 공포가 없었겠는가? 그들이 화랑이 아닌 화랑의 할아버지였더라도.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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