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는 두 광대와 연산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왕의 남자’는 두 광대와 연산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제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이 분명하다. 시간의 흐름이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법. 유난스러웠던 2023년 혹한(酷寒)도 곧 추억 속으로 사라져 옛날이야기가 된다.

나른함과 안온함을 동시에 선물하는 봄 햇살을 받으며 옛날 영화 한 편쯤 골라 보고 싶은 시기. 알다시피 ‘옛날 영화’란 고리타분한 설정과 비슷비슷한 스토리를 반복하는 단순한 영화를 지칭하는 게 아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극장은 물론 넷플릭스 등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 높은 걸 보면 ‘옛이야기’는 여전히 마르지 않는 예술의 재료로 역할하고 있는 것 같다.

아래 ‘그 옛날 조선’을 배경으로 한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턱밑까지 다가선 봄을 기다리며 감상해보면 어떨까.

 

광대의 왕 장생을 연기한 배우 감우성.
광대의 왕 장생을 연기한 배우 감우성.

두 명의 광대, 폭군에 맞서는 혁명가로… ‘왕의 남자’

혁명을 꿈꾸는 자는 두려움 속에서 살지만 무료하지 않다. 전복시키려는 대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그렇다.

20세기 초반 레닌과 트로츠키, 그 이전 19세기를 살았던 무정부의자 오귀스트 블랑키와 미하일 바쿠닌은 바로 이렇게 두려움에 매혹됐던 사람들이다.

프랑스 파리 지하철에 폭탄을 던져 수십 명의 승객을 살해한 열여덟 살 아나키스트 에밀 앙리는 “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가”라는 판사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지상에 죄 없는 부르주아는 없다.”

신념이 자신을 단두대로 보냈음에도 죽음의 순간까지 앙리는 모반과 반역이 주는 매력에 매료돼 있었다. 사족은 그만 달고 이제 영화로 가자. 여기 남사당패 줄광대 둘이 있다. 장생(감우성 분)과 공길(이준기 분). 태생적 신분에 의해 정해진 반상의 구분이 엄혹하기 짝이 없던 조선시대.

 

정치와 경제, 문화적 헤게모니까지 독점했던 양반이 아닌 것은 물론,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들거나 이것들을 사고파는 평민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천민. 게다가 둘은 당시로선 ‘하늘의 법도를 거스르는 인간 이하의 것들’로 하대 받던 동성애자다.

양반집 잔치에서 탈춤판을 벌이고, 그도 안 되면 예쁘장한 공길의 몸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는 최하층 계급.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 한 술이 급한 이들에게 언감생심 반역은 뭐고, 모반은 또 뭐란 말인가?

그들은 분명 앞서 말한 에밀 앙리와는 하등 관계없는 족속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건 무슨 일. 길거리에서 풍자극을 공연하던 이들이 권세 당당한 내시의 눈에 들어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무소불위의 연산군 앞에 불려간다.

대운이 트여 연산의 총애를 얻게 되는 공길과 장생. 뿐이랴, 공길은 만조백관의 어버이로 불리는 임금의 침소에까지 불려 다닌다. 이런 신분 상승이 어디 있으며, 이처럼 갑작스런 계급 역전을 또 어디에서 봤던가.

먹기보다 굶기를 자주 하던 광대들에게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진 산해진미는 감읍과 황송을 절로 부른다. 그런데, 누구나 예상했듯 반전이 없을 수 없다.

‘왕의 남자’는 “그래서, 그들은 고깃국에 쌀밥 먹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을 맺는 아동용 전래동화가 아니라, 감동을 산업화함으로써 존재를 증명 받는 영화이기에.

비극은 공길의 아름다움(?)에서 시작된다. 왕이 그에게 계간(鷄姦)의 욕망을 품은 것이다. 남녀의 역할이 엄연하다는 공맹의 도덕을 줄줄 외우고 다니던 정승·판서와 질투로 이름 높은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가 이를 두고 볼 리 만무하다.

사태가 일촉즉발 생명이 오가는 형국으로 치닫자 장생과 공길은 궁정광대에서 ‘혁명가’로 존재를 전이시킨다.

모든 혁명이 적대적 계급관계에 있는 상대방을 향한 물리적 폭력의 형태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공길과 장생은 그럴 만한 힘을 소유하지도 못했다. 하여, 그들이 선택하는 혁명 노선은 왕에 대한 가시 돋친 날선 비판과 자기 학대다.

 

'왕의 남자' 극중 장면.
'왕의 남자' 극중 장면.

사람 같지도 않은 천출의 광대무리가 만인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임금을 향해 상소리를 내뱉다니. 의외의 놀라움에 비례해 충격의 진폭 역시 커진다. 이 과정에서 장생은 달구어진 부젓가락에 눈을 잃고, 공길 역시 죽음 직전까지 간다.

이윽고 눈앞에 닥친 파국. 장생·공길과는 달리 물리력을 가진 모반 세력이 연산군을 향해 칼을 빼든다. 몰려드는 반군의 고함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태연히 줄을 타던 둘은 슬픔과 절망만을 강요한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궁전 상공에서의 스톱모션 라스트 신.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파괴할 수 없었던 광대의 왕 장생과 그의 남자 공길이 꿈꾼 혁명이 실패하던, 아니 온전히 성공하던 순간이었다.

‘왕의 남자’가 누구도 예상 못한 관객 동원력을 발휘한 이유는 뭘까? 누구나 가슴 속에 하나씩은 품고 있는 모반과 반역의 칼, 그 서슬 푸른 번득임을 보여줬기 때문 아닐지.

맞붙으면 상호 적대적인 두 계급 중 하나의 목은 떨어져야 끝이 나는 모반과 반역, 통칭해 혁명은 눈에 보이는 힘만으로 추동되는 게 아니다. 때론, 보이지 않는 에너지도 혁명의 힘이 된다.

그 힘의 발원지는 타의에 의해 사랑의 종말을 맞은 자들의 지독한 자학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장생과 공길은 얼핏 에밀 앙리와 닮기도 했다.

 

여진구는 영화 ‘대립군’에서 광해군 역할을 맡았다.
여진구는 영화 ‘대립군’에서 광해군 역할을 맡았다.

광해군보다 주목받은 최하층 백성 이정재… ‘대립군’

조선의 왕위 계승역사는 피와 살점이 튀고 뼈가 부러지는 ‘골육상쟁사’라 불러도 무방하다. 과장이나 의도적 폄훼가 아니다.

왕국이 세워진 초기.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는데 걸림돌이 될 이복동생을 도륙했다. 역사에 관심이 크지 않은 이들도 숙부인 세조가 조카 단종의 살해 명령을 내렸다는 것 정도는 안다.

왕조국가에서 정승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면, 왕은 자기 위에 아무도 없다. 해서 부끄러울 일도 경계해야 할 일도 원칙적으론 없었다. 다만, 왕조의 건국이념이 된 경전의 가르침을 형식적으로 섬겼을 뿐.

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26대 왕 고종과 함께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무능하고 무기력했던 왕’으로 불리는 경우가 흔하다.

당쟁을 일삼던 신하들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했고, 임진왜란 때는 나라와 백성을 버려두고 중국으로 도망쳤다. 자신의 책임인 국가방위는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 광해군에게 억지로 떠넘기고.

정윤철 감독이 연출한 영화 ‘대립군’은 바로 전쟁을 피해 도망친 왕과 허울뿐인 통치권을 억지로 나눠가진 왕자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오만 가지 영화는 다 누렸지만, 책임은 방기했던 왕족들의 한심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앞서 말한 것들은 영화와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니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그렇다면 ‘대립군’의 영화적 완성도는 어느 정도일까?

분명 감독은 여진구가 연기한 소년 광해군이 임진왜란이라는 극단의 비극적 상황을 통해 인간적 성장을 이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을 터.

 

‘대립군’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배우 이정재.
‘대립군’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배우 이정재.

광해군 역시 왕이 되는 과정에서 이복동생 영창대군은 물론, 친형 임해군까지 죽인 사람이다. 그러나, 국방과 외교 분야에선 능력을 보인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립군’은 광해의 국방과 외교 관련 소양이 임진왜란의 참상과 고통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걸 말하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감독의 메시지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영화의 구성과 흐름을 통해 관객의 자연스런 수긍을 얻어내야 한다. 하지만, ‘대립군’에선 설득의 바탕이 되는 이해와 감동을 끌어낼 코드가 보이지 않는다.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엉성한 역사교과서’ 같다.

살인과 약탈이 벌어지는 장면이 갑작스럽게 툭 끊겨 전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하는 화면으로 뜬금없이 전환되고, 불화를 일으키던 대립군과 양반, 백성과 왕실관료의 갑작스런 화해는 그 계기와 연결고리가 없거나 약하다.

영화의 제목인 된 대립군은 궁핍과 신분적 한계 탓에 남의 군역(軍役)을 대신해주고 밥을 벌던 사람들을 뜻한다. 최하층 백성이란 뜻.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를 구하고자 스스로 칼과 낫을 들었던 건 왕과 왕자도, 정승과 판서도 아닌 바로 이 최하층 백성들이었다. 나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했으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

조선의 역사와 비슷하게 영화 ‘대립군’을 구하는 것도 바로 그들이다. 대립군으로 분한 배우 이정재, 박원상, 한재영 등의 호연은 중심을 못 잡고 휘청대는 영화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역할을 해냈다.

특히, 그저 잘생긴 청춘스타에서 연기력 좋은 배우로 진화 중인 이정재는 거듭 칭찬해도 넘치지 않는다.

영화 ‘관상’에서도 수양대군 역할을 맡아 야욕과 동정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 그는 곧 ‘사극에 썩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타이틀까지 얻을 듯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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