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시간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비바람 / 젊은 미인의 살결도 젊은 열정의 가슴도 / 무자비하게 쓸어내리는 심판자이지만 // 시간은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거장의 손길 / 하늘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 시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시키듯 /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빛나는 얼굴이 살아난다 // 오랜 시간을 순명하게 살아나온 것 /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노동자 시인이라고 불리는 박노해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에 수록된 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의 1연에서 4연까지이다. 인용이 좀 길지만 모두 8연으로 된 시의 앞 절반을 가져와 보았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시간이 흐르면 늙고 낡아지고 때론 썩고 부패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스러지고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오래된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였고, 오래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선언한다.

지난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가 세상을 떴다. 1952년 25살의 젊은 나이에 영국의 여왕이 된 그녀는 영국을 포함한 열여섯 개 나라(영 연방)의 군주로서 70년을 통치하였다. 물론 영국의 왕은 정치적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 입헌군주국의 형식상의 최고통치자이기에 엘리자베스 2세 또한 영국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록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영연방의 수장이면서 영국 성공회의 최고 치리자로서(세계 성공회 전체의 수장은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일찍 왕위에 올랐고 오래 산 만큼 오랫동안 영국의 왕으로 재위한 까닭에 엘리자베스 2세는 2022년 기준으로 입헌군주제의 나라와 절대군주제의 나라를 모두 포함한 세계의 왕들 가운데서 최고령의 왕이었고, 최장기간 재위한 군주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오래됨이 마냥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영국의 왕이 된 찰스 3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였던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비운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남편 필립공을 먼저 보내는 슬픔도 겪어야 했다.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왕족을 거쳐 왕이 되었기에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제국주의 폭력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고, 계속되는 군주제 폐지론에 시달리며 왕권이 흔들리기도 하였다. 실제로 자메이카와 앤티카바부다 등 카리브해의 섬나라들은 여왕의 서거를 계기로 영연방으로부터 탈퇴하여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한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던 영국은 이제 많이 쪼그라든 것이 사실이다. 여왕의 시대가 저물면서 그 쇠퇴가 더 빨라질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이 빛을 발하고 가치가 높아지고 고전으로 명작으로 그 삶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다. 시인의 말처럼 비바람의 시간을 잘 견뎌내고, 노회하게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낡아가고 늙어갈 때 오래된 것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