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호가 울 밑에서 으르렁대도 / 나는 코 골며 잠잘 수 있고 / 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려 있어도 / 누워서 꿈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 / 모기 한 마리 왱 하고 귓가에 들려오면 / 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구나 / 부리 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 어이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불어넣느냐”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려 있는 한시 ‘증문’(憎蚊, 얄미운 모기)의 첫 8행이다. 조선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73세라는 나이로 장수를 하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 유학의 한 학풍인 실학을 기반으
“이십대에는 / 서른이 두려웠다 /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 마흔이 되니 /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박우현 시인의 시집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작은숲, 2014)에 수록된 같은 제목의 시 1연이다. 겪어보지 않은 앞날은 늘 두렵고 떨리지만 지나온 날들은 아름답게 기억되게 마련이다. 그때는 좋은 줄 몰랐어도, 어쩌면 힘들고 괴롭고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었다고 해도 돌아보면 소중하고 아름다운 날들이 옛날의 그때 그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 돌멩이 생김새만 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문정영 시인의 시집 ‘그만큼’(시산맥사)에 수록된 시 ‘그만큼’의 1행부터 7행까지다. “따뜻한 감성을 바탕으로 존재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함께 삶의 원형질을 잘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시인의 정서는 이 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비가
“시간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비바람 / 젊은 미인의 살결도 젊은 열정의 가슴도 / 무자비하게 쓸어내리는 심판자이지만 // 시간은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거장의 손길 / 하늘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 시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시키듯 /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빛나는 얼굴이 살아난다 // 오랜 시간을 순명하게 살아나온 것 /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노동자 시인이라고 불리는 박노해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에 수록된 시 ‘오
“거리로 마을로 산으로 골짜구니로 / 이어가는 전선은 새 나라의 신경 / 이름 없는 나루 외따른 동리일망정 / 빠진 곳 하나 없이 기름과 피 / 골고루 돌아 다사론 땅이 되라 // 용광로에 불을 켜라 새 나라의 심장에 / 철선을 뽑고 철근을 늘이고 철판을 피리자 / 세멘과 철과 희망 위에 /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 가자”1946년 7월 15일에 조선문학가동맹이 펴낸 ‘문학’지 창간호에 실린 김기림의 시 ‘새나라송(頌)’의 1연과 3연이다. 이 시는 1948년 4월 아문각 출판사에서 간행된 시집 ‘새노래’에 다시 실렸다.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뒷장에 /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못할 감격에 떨린다! / 이역의 하늘아래서, 그대들의 심장속에 용소슴 치던 피가 / 이천삼백만의 한사람인 내혈관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듯 찢어질듯. / 침울한 어둠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 올림픽의 거화를 켜든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한자만 한글로 바꾸고 원문 그대로 옮김)1936년 8월 11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심훈의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마라톤에 우승한
“버스를 기다리다가 /‘병신인가 베’하며 쳐다보는 눈길이 / 부담스러운 날은 / 길 위에 돌부리가 / 무진히도 많이 솟아났다 // 보이는 것은 / 어느 하나 다를 게 없다 / 세상이란 다 이런 건가 보다 / 눈멀고 귀먹어 살면 그만인 것을”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최명숙 시인의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들은 절로 떠난다’(미리내, 2001)에 수록된 시 ‘희망’의 첫 2연이다. 뭔가 ‘나’와는 다른 모습, 어쩔 수 없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움직임에 던져지는 타인의 시선에 시인은 눈을 떨궈 길 위에 솟아오른 돌부리를 본다. 일상적
“담쟁이가 싫었다 / 무엇이든 엉망으로 휘감는 넝쿨식물이 싫었다 // 곁을 둔다는 말 / 곁은 조금 떨어진다는 말 / 시든 풀포기를 심어도 되살아 오를 것 같고 / 차 한 잔 놓아두고 싶은 곳 / 반쯤이나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배냇정서는 농촌이고 감각은 도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전영관 시인의 시집 ‘바람의 전입신고’(세계사, 2012)에 수록된 시 ‘곁’의 1연과 2연이다. 쌉사래하면서 달짝지근한 칡물처럼 그의 시구를 몇 번 곱씹으니 처음에는 갸우뚱하던 의미가 은근히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 박힌다. 담쟁이는 곁을 두지 않는다. 무엇
“가장 날카로운 칼과 / 가장 날카로운 告白은 / 다르지 않다. // 가장 날카로운 칼은 / 그 칼날에 / 그리하여 저의 낯을 비춰 본다. // 그리하여 / 가장 날카로은 칼은 / 꽃잎 앞에도 무릎을 꿇고, / 그 꽃잎은 / 그 칼을 쥔 손목에 / 입을 맞춘다.”“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라고 노래했던 김현승 시인의 시집 ‘김현승시전집’(관동출판사, 1974)에 수록된 시 ‘무기의 의미 Ⅱ’의 처음 세 연이다. 칼은 전통적으로 무기를 대표하고 시대를 아울러서 전쟁을 상징한다. 시인은 이 칼이 꽃잎 앞에 무릎을 꿇고, 꽃잎은 칼
“매일 함께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 삼시 세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에서 /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집는데 /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 한 번에 먹자 하니 입속이 먼저 짜고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 나머지 한 장을 떼 내어 주려고 /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창비청소년시선의 특별판으로 나온 시집 ‘너를 만나는 시 1’에 실린 유병록 시인의 시 ‘식구’의 1연과 2연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나누어 가져야지요 // 하나의 막을 사이에 둔 / 농도가 다른 액체가 / 농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쓰듯 / 그렇게 나누어 맞춰야지요. // 그대의 새벽잠과 / 나의 저녁잠 / 혹은 그대의 휘파람과 / 나의 한숨 / 나누어 가져야지요 / 그대의 약냄새와 / 나의 술냄새 / 그대의 30시간과 나의 18시간.”삶의 존재론적 의미라는 주제를 다감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따뜻하게 보듬는 박상천 시인의 시집 ‘말없이 보낸 겨울 하루’에 실린 시 ‘삼투압’의 일부이다. ‘그대’와 ‘나’는 삶의 패턴이 다르다. ‘그대’가 휘파람을 불며 넉넉한 삶을
“미치고 싶었다. / 四月이 오면 / 山川은 껍질을 찢고 / 속잎은 돋아나는데, / 四月이 오면 /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 우리네 祖國에도 / 어느 머언 心底, 분명 /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 그날이 오기까지는, 四月은 갈아엎는 달. / 그날이 오기까지는, 四月은 일어서는 달.”‘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친 신동엽 시인이 4·19 혁명이 일어난 지 6년 뒤인 1966년 4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실었던 시 ‘4月은 갈아엎는 달’의 3연과 마
“다른 인생을 산다는 건 / 빈손으로 시작한다는 뜻이 아닐 거야. / 그렇지만 그건 / 용기와도 관계없는 일일 거야. / 팔베개를 거두며 / 중얼거렸네. / 오늘이 어제와 달라서 / 불편한 건 / 손가락 때문이 아니라고 / 당신이 대답했네.”여태천 시인의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민음사, 2013)에 실린 시 ‘비밀’의 일부이다. 짧건 길건 삶의 길을 걷다 보면 이른바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하는 마디들이 한두 개씩은 있게 마련이다. 어떠한 계기가 있어 의지를 가지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경우도 있겠지만, 시인은 다른 인생을
“냄비는 삿포로 라면을 끓여낸다 / 냄비는 동원 참치국을 끓여낸다 / 냄비는 오뚜기 옥수수 스프를 끓여낸다 / 냄비는 파 마늘 햄 미역 깨소금 담고 미역국 끓여낸다 / 냄비는 모든 것을 담고 모든 것을 끓여낸다”김응교 시인의 시집 ‘씨앗/통조림’(하늘연못, 1999)에 실린 두 연짜리 시 ‘냄비’의 첫 연이다. 식구를 한국에 남겨 두고 1996년에 도쿄외국어대학에 공부하러 가서 와세다대학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하다가 귀국하기까지 12년 동안 일본에서 혼자 생활해야 했던 시인에게 냄비는 소중한 살림살이 도구였을 것이다. 그러니 냄비밥,
“쓰러진 나무를 보면 / 나도 쓰러진다 // 그 이파리와 더불어 우리는 / 숨쉬고 / 그 뿌리와 함께 우리는/ 땅에 뿌리박고 사니- // 산불이 난 걸 보면 / 내 몸도 탄다 // 초목이 살아야 / 우리가 살고 / 온갖 생물이 거기 있어야 / 우리도 살아갈 수 있으니”정현종 시인의 시집 ‘한 꽃송이’(1992, 문학과 지성사)에 실린 시 ‘나무여’의 일부이다. 이 시집을 찬찬히 읽어가다 보면 나무와 꽃과 흙과 산 등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사랑과 경외의 눈길을 마주치고 깊은 사색과 관조의 세계에 젖어든다. 그리고 어느 샌가 모르게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증명할 수 없어서 / 과연 영험한 짐승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게로군 /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 가슴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이 / 줄을 잇는다고 치자 눈과 함께 왔다 / 눈과 함께 사라지는, 가령 / 호랑이 발자국 같은 그런 사람이”손택수 시인의 시집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에 실린, 같은 제목의 시 ‘호랑이 발자국’의 마지막 일곱 행이다. 현재 한반도 땅에서는 더 이상 야생의 호랑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일제의 조선얼 말살 정책으로 호랑이를 다 잡아 없앴기 때문이
“철거를 앞둔 임대 아파트 아줌마들 모여 / 인형 눈을 붙인다 / 매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 비비며 / 밤새 눈을 달아준다 // 말 못하는 곰이나 고릴라에게 눈을 주고 / 반찬값 몇 푼 챙기는 아줌마들의 수다가 / 가물가물 칠순 어머니, 눈물을 단추처럼 매달고 사신 / 당신 이마 위로 터진다 톡톡 / 오래된 별처럼, // 눈 동그랗게 뜨고 어디 한번 살아봐라 / 눈 없인 살겠지만 / 눈물 없이는 살 수 있는 세상인지”김륭 시인의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문학동네, 2012)에 실린 시 ‘눈물이 완성되는 순간’의
“지난 해는 / 참 많이도 줄어들고 / 많이도 잠들었읍니다 하느님 / 심장은 줄어들고 / 머리는 잠들고 / 더 낮을 수 없는 난장이 되어 / 소리 없이 말 없이 / 행복도 줄었읍니다”(원문 그대로 옮김)정현종 시인의 시집 ‘나는 별아저씨’(1978, 문학과지성사)에 실린 시 ‘냉정하신 하느님께’의 1연이다. 44년 전 출간된 시집의 빛바랜 종이에 적힌 시구가 어쩌면 이렇게 올해 벽두의 상황을 그대로 그려주는지…. 2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는 지구별의 참 많은 사람들을 잠들게 했다. 우리들의 심장은 두려움과 긴장으로 쪼그라들었다
“模型心臟(모형심장)에서붉은잉크가업즐러젓다.내가遲刻(지각)한내꿈에서나는極刑(극형)을바닷다.내꿈을支配(지배)하는者(자)는내가아니다.握手(악수)할수조차업는두사람을封鎖(봉쇄)한巨大(거대)한罪(죄)가잇다.”(한자만 한글로 병기하고 원문 그대로 옮김)26세에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이 1934년 8월 8일자 조선중앙일보에 게재한 시 ‘오감도 시제15호’의 마지막 6연이다. 어절 사이는 물론 문장 사이의 띄어쓰기도 하고 있지 않은 이 시는 ‘오감도’ 연작시의 열다섯 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원래 ‘오감도’ 연작시는 1934년 7월 24일
“구두 닦는 사람을 보면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구두 끝을 보면 /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길 끝을 보면 /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천양희 시인이 1995년에 창비 출판사에서 펴낸 시집 ‘마음의 수수밭’에 실린 시 ‘그 사람의 손을 보면’의 일부이다. 천양희 시인은 연마다 구두 닦는, 창문 닦는, 청소하는, 마음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며 맑고 환한 빛을 찾아내고 있다.사람을 지칭하는 여러 학명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