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로마 아티카(Attica) 갤러리에 열두 마리 말이 전시된 장면.

현대미술에서 1960년대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이 진행되던 시기이다. 이미 20세기 초부터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 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술 형식들이 등장해 미술의 내연과 외연을 넓혀주었다. 어쩌면 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여준 탈경계는 반세기전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미술에서 이탈리아는 지금까지도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수천 년의 미술을 이탈리아가 이끌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미술에서 이탈리아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1909년 마리네티가 일으킨 ‘미래파(Futurismo)’가 그나마 꿈틀거렸다 평가할 수 있지만, 그마저 세계대전의 발발로 금세 꺼지고 말았다. 1960년대 후반 중북부 이탈리아 주요 도시들에서 포스트모던을 대표할 만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미술사는 이 움직임을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라고 불렀다.

아르테 포베라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평론가이자 큐레이터였던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이다. 첼란트는 미술가들이 사용한 값싼 재료에서 하나의 미술 운동으로 묶을만한 공통분모를 찾았다. 아르테 포베라를 대표하는 미술가로는 야니스 쿠넬리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주세페 페노네, 마리오 메르츠 조반니 안셀모 등응 꼽을 수 있는데, 이들 모두 전통적으로 사용된 미술 재료 대신 주변에서 발견되는 흔하고 평범한 재료로 작품을 창작했다.

아르테 포베라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쿠넬리스 1969년작 ‘무제(열두 필의 말)’이다. 쿠넬리스는 로마에 새롭게 문을 연 아티코 갤러리 지하 창고에 살아 있는 열두 마리 말을 전시했다. 쿠넬리스의 작품은 미술계 안팎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어떤 평론가는 쿠넬리스의 작품에 대해 “동물의 물리적 현존은 저속한 냄새와 소리가 갤러리로 침투했음을 의미했다. 미술가의 개입이 없었음이 명백하고 순전히 모방일 뿐인 이 작품은 창조로서의 미술이 사멸했음을 알리는 듯했다.”

살아 있는 말을 전시했다는 파격적인 발상이 평론가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한 모양이다. 하지만 반문한다. 이미 쿠넬리스 보다 반세기 앞서 뒤샹은 남성 소변기를 작품으로 제시한 적 있고, 미국에서는 앤디 워홀이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인 깡통을 작품으로 선보이지 않았는가. 미술가의 개입 없이도 미술작품이 탄생될 수 있는 시대였고, 엄격하게 보자면 미술가의 개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쿠넬리스가 전시를 위해 살아 있는 말을 작품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쿠넬리스는 앵무새나 선인장과 같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작품으로 전시했다.

쿠넬리스는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미학적 정체성을 회화에서 찾았다. 그가 선택한 말들은 일종의 ‘살아 있는 그림(Tableau Vivant)’으로 볼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쿠넬리스의 작품은 20세기 미술을 혁신한 뒤샹의 업적을 계승해 살아 있는 말을 새로운 개념에서의 ‘레디-메이드’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소변기를 그것의 원래적 기능이나 목적에서 떼어내 미술이라는 새로운 문맥에 배치해 작품이 탄생될 수 있었다면 살아 있는 말을 작품으로 전시한다고 해서 전혀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쿠넬리스는 작업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전통 미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생소한 소재나 재료를 사용한다. 석탄이나 철근처럼 산업화와 공업화를 연상하는 작품이 있는가하면, 양모나 커피가루 등 문화와 현대사회의 경제구조를 암시하는 재료로 작품을 창작했다. 쿠넬리스의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작품이 제작되고 설치되는 지역이나 국가의 문화적 역사적 장소적 맥락이다.

특히 쿠넬리스는 작품을 통해 소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획일화된 가치에서 벗어나 일상의 빈곤한 물건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본질을 좇았다.

/김석모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