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보며 600년 경주 남산 마애불 일어설 날은?
②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

남산 마애불이 발견된 2007년 당시 현장을 찾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좌측).

676년.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고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7~8세기 문화예술은 물론, 정치와 경제, 종교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낸다.

그 시기 신라의 지배층은 국가가 관리하는 거대한 사찰을 연이어 건립하고, 영적인 힘이 깃든 산으로 인식되던 경주 남산에 수많은 불상을 세웠으며, 산 속 커다란 바위에 부처의 형상을 조각한다.

신라는 석가모니의 이상(理想)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불국정토(佛國淨土)를 꿈꾸던 나라였으니, 불교와 관련한 대형 프로젝트가 곳곳에서 진행됐던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쓰러져 그 전체 모습을 숨기고 있는 남산 열암곡의 마애불도 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가 5m에 육박하고, 새겨진 바위의 무게가 80t에 이르는 남산 마애불이 우뚝 섰던 날. 그 웅장함과 빼어난 예술성 앞에 불교를 숭상했던 수많은 신라 사람들이 감탄하며 합장배례(合掌拜禮) 하지 않았을까?

이희진의 논문 ‘경주 남산 열암곡사지 석조불상 연구’는 7~8세기 열암곡 마애불상을 포함한 경주 남산에 조성됐던 거대한 불교 유적이 발견됐을 때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남산 열암곡사지(列岩谷寺址)는 고위산 남서쪽 백운계(白雲溪) 본류의 오른쪽 열암곡에 위치한 절터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2리 마을회관에서 백운암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가면 열암곡이 있으며 다시 800m 정도 오르면 열암곡사지에 이르게 된다. 현재의 열암곡사지는 보수된 모습이지만 그 전에는 건물의 초석들과 넘어지고 깨진 불상의 부재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2007년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주변을 발굴조사하고 불상과 절터를 보수·정비하였다. 그 과정에서 보수·정비된 석조여래좌상과 30m 정도 거리에서 5m가 넘는 대형 마애여래 입상이 넘어진 채 발견되면서 크게 주목받은 바 있다.”

그야말로 ‘우연한 발견’이었다. 의도하거나 목적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발견된 쓰러진 남산 마애불. 하지만, 발견이 우연했다고 이후 이어진 연구와 보존·복원 노력까지 우연에 기댈 수는 없었다.

신라 불교예술의 주요한 유물임이 분명한 남산 마애불은 최초로 현대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2007년부터 지금까지 ‘역사의 필연’을 증명하는 불상 중 하나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국가 예산 투입 ‘미끄러짐 붕괴' 방지 위한 옹벽 구축부터 시작
3D스캔 등으로 형상화 작업·암석 정밀진단 등 복원작업 거쳐
경주문화재연구소 등 ‘보존 관련 전문가 검토회의’ 꾸준히 열어

□ 2007년 발견 때부터 진행된 연구와 보존·복원 노력

남산 마애불, 혹은 열암곡 마애불상으로 지칭되는 불상은 ‘귀한만큼’ 그 연구와 조사, 보존과 복원 과정도 조심스럽고 까다롭게 진행됐다. 국가의 예산이 투입되고, 고대사와 신라의 문화를 연구하는 단체의 적지 않은 인력들이 동원돼 이 불상의 비밀을 해석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남산 마애불을 포함한 그 일대 고대 유적에 관한 발굴조사는 ‘경주 남산 일원 종합정비사업’이란 큰 틀 아래서 이뤄졌다.

미시적으로 ‘남산 열암곡 마애불상 긴급정비사업’이라 지칭된 이 프로젝트는 남산 마애불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주변을 정비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와 관련 당시 조사를 주도한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열암곡 마애불상이 위치한 지점은 경사가 심한 사면이었다. 추가적인 슬라이딩(미끄러짐에 의한 붕괴)의 우려가 제기되었기에, 불상 전면으로 임시 옹벽을 구축해 슬라이딩을 방지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붕괴된 채 발견되었기에 정비사업 초기엔 더 이상의 파손을 방지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는 이야기다. 임시 옹벽은 모래주머니에 흙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조됐다.

훼손을 막은 이후인 2008년 초반기엔 사진 촬영과 인근 스케치, 유적을 3D스캔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다음 단계로 열암곡 마애불상 암석에 대한 안전진단 연구용역이 의뢰됐고, 이를 통해 암석의 조사와 마애불에 새겨진 바위의 성분이 분석됐다. 쓰러진 마애불이 발견된 2년 뒤에는 모래주머니로 쌓은 임시 옹벽의 붕괴를 우려하는 학계의 지적이 있어,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옹벽 시공 방법인 자연석 석축이 만들어졌다.

남산 마애불은 발견된 위치의 특성상 주변 세굴(洗掘·물에 의해 바닥이 파이는 것)과 토사 유실의 위험성이 상존한다. 이를 방지하고 유물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서는 주변의 정비공사가 필수적이었다. 이런 작업은 2011년 상반기까지 꾸준히 계속됐다.
 

현재는 남산 마애불 보호를 위해 불상이 새겨진 바위 주위로 철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사진 이용선기자
현재는 남산 마애불 보호를 위해 불상이 새겨진 바위 주위로 철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사진 이용선기자

□ 마구잡이식 유물 복원은 불행 불러올 수 있어

발견되거나 발굴된 유적과 유물은 비단 한국에만 있지 않다. 그것들에 관한 연구와 조사, 보존과 복원을 위한 투자는 세계가 보편적이다.

몇 해 전 이란을 여행했을 때 아케메네스 왕조의 광대한 유적지 페르세폴리스를 찾았다. 자그마치 2천500여 년 전 축조된 페르시아의 대표 유적.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에서까지 조공을 받던 강위력한 고대 제국 페르시아의 왕들은 페르세폴리스에서 휴양을 즐겼다. 한국에서도 개봉돼 인기를 끈 영화 ‘300’에 등장하는 크세르크세스(Xerxes)도 그 왕들 중 하나다.

하지만, 영화는 짧았다.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3세는 아케메네스 제국을 짓밟고, 페르세폴리스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부서진 거대한 열주(列柱)가 서있고, 곳곳에 깨어진 조각상이 남은 황량한 페르세폴리스다.

그러나, 그곳은 어떤 유적지보다 인상적이다. 역사의 흔적은 파손된 자체로도 크나큰 문화예술적 감흥을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법이므로.

억지스럽고 조잡하게 진행된 복원은 차라리 망가진 채 남겨진 유적과 유물만 못하다. 기자는 그런 사례를 2011년 라오스에서 직접 목격했다. 라오스 북부에 자리한 루앙프라방은 1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란쌍왕국의 번성했던 수도였다. 주변 국가들을 제압하며 번영을 누렸던 란쌍왕국의 지배자들은 7~8세기 신라의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지 않은 불교 사원을 만들었다. 라오스도 신라처럼 불교국가였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오늘날 루앙프라방의 불교 사원들은 시멘트로 덕지덕지 보수된 불탑과 석상으로 인해 건립 당시의 신비함과 우아함을 잃고 있다. 막무가내식 유물 복원이 어떤 의도치 않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라오스의 불교 사원들.

그래서다. 쓰러진 남산 마애불의 복원은 지극히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철저한 사전조사와 치밀한 복원 계획 없이 함부로 불상을 일으켜 세우려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게 역사학계의 공통된 목소리.

경주문화재연구소를 포함한 남산 마애불 보존·복원의 주체들이 주변 환경 보존과 과학적 검증을 위해 ‘보존 관련 전문가 검토회의’를 열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상이 새겨진 암석에 대한 정밀한 안전 진단과 변위측정 계측기 설치 등도 이런 필요성에 의해 진행된 작업이었다.
 

높이 4m 60cm의 불상이 새겨진 80t의 남산 열암곡 바위. 옆에 선 사람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대략 가늠할 수 있다.  /사진 이용선기자
높이 4m 60cm의 불상이 새겨진 80t의 남산 열암곡 바위. 옆에 선 사람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대략 가늠할 수 있다. /사진 이용선기자

□ 다시 궁금증 하나… 남산 마애불은 왜 붕괴됐는지

철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1818 ~1883)에 의하면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어떤 현상도 본질에 우선할 수 없다’.

이를 남산 마애불 복원에 대입한다면 먼저 불상이 무너진 이유를 정확히 파악해야 앞으로의 복원 해법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원인 분석에 이은 결과 예측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단단한 바위에 새겨진 열암곡 마애석불이 힘없이 무너진 이유는 상당한 강도의 지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건 역사학계의 공통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지진 발생의 시기가 언제였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부경대학교 환경지질과학과 지질구조재해연구실은 지난 2009년 발표된 논문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여래입상 붕괴에 대한 지질학적 접근’에서 남산 마애불의 붕괴 시기를 아래와 같이 추정했다.

“2007년 5월 경주 남산의 열암곡에서는 석불좌상 정비사업 중 8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여래입상(남산 마애불)이 전복된 상태로 발견됐다...(중략) 이 마애여래입상의 붕괴가 779년의 경주 지진과 같은 지질 재해와 연관될 가능성을...(후략)”

그로부터 11년이 흐른 2018년에는 남산 마애불 붕괴를 가져온 지진이 1430년 발생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주장이다.

이 두 가지 지진 발생 추정 시점에는 600년 가까운 시차가 있다. 어떤 게 보다 합리적인 추측일까? 다음 회에선 이를 포함한 또 다른 ‘남산 마애불’의 비밀을 살펴볼 예정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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