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세 노병의 잃어버린 훈장 < 4 >

장사해변에 조성된 기념공원에서 전우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생존 노병들. /이용선기자

지난 2019년 10월 1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장사상륙작전 참전 용사 중 단 1명도 훈장을 받지 못했습니다’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1950년 9월 15일 139명의 전사자와 92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경북 영덕 장사해변에서의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 가족 중 한 명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청원(請願)은 전쟁을 겪지 못한, 곧 국방의 의무를 지키려 입대할 20대 청년들의 눈길까지 끄는 것이었다.

선친이 한국전쟁 당시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다고 밝힌 청원인은 “대부분 15세에서 18세의 어린 학도병으로 참전한 용사들은 최근까지도 그 존재가 잊혀졌다”고 지적했다.

이에 덧붙여 “참전용사들과의 대화에서 이 작전에 참전한 학도병 중 단 한 명도 훈·포장을 받은 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안타까워했다.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에 작지 않은 도움을 줬음에도 장사상륙작전은 오랜 시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게 군사전문가들을 포함한 세간의 평이다.

청원인은 “해군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한) LST문산호의 선원 10명이 올해(2019년) 6월 8일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면서도, “수많은 희생자를 낸 참전용사들은 왜 한 명도 훈장을 받지 못한 것인지…”라는 의문을 드러내며 정부와 국방부, 육군본부의 무관심을 질타했다.

그러나, 이 절절한 장사상륙작전 유족의 청원은 대답 없는 메아리로 남았다.
 

참전 학도병 자손 ‘靑 청원 글' 올리고
文 대통령·참전유공자 만찬자리서도
공적 치하했지만 서훈 추진 지지부진
정부·국방부·육군본부 ‘무관심' 일관
관련법 개정 등 적극적 의지 보여줘야

△ 대통령의 전공 평가와 상찬(賞讚)이 있었음에도

같은 해인 2019년 6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 182명을 청와대 영빈관으로 모셨다. 대부분이 80대와 90대인 이들이 호텔이 아닌 청와대로 초청돼 식사를 대접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날 문 대통령은 6·25를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이 함께 전쟁의 폭력에 맞선 정의로운 인류의 역사”라 평가했다.

또,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인 류병추(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장·91)씨를 가리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공헌하셨다”고 말했다. 이른바 ‘6·25전쟁 영웅’을 소개하는 순서에서였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 땅의 모든 군인을 총괄·지휘하는 국군통수권자다. 국군통수권(國軍統帥權)이란 육·해·공군을 포함한 국방기구와 그 아래 편제된 모든 국군을 지휘통할(指揮統轄)하는 권한을 지칭한다.

우리의 헌법과 법률, 그리고 국군조직법에 근거하면 국군의 최고통수권자는 바로 대통령이다.

장사상륙작전이 있고난 후 자그마치 69년이 지나서야 국군통수권자로부터 전투에서 세운 공적을 인정받고 칭찬받은 류 회장을 포함한 772명의 학도병들.

이는 소년의 티를 갓 벗은 18살 청년들이 아흔을 넘긴 노인이 돼서야 자신의 행위가 나라를 구하는 힘이 됐다는 걸 인정받은 것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2020년 개관한 경북 영덕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그곳에 들어서는 관람객들은 가장 먼저 아래와 같은 가슴 찡한 글귀와 만나게 된다.

“학생들은 학업 대신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학도의용군을 조직하고 조국을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학생의 신분으로 조직된 학도의용군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국가의 위기 극복에 기여했고, 전쟁 중에 현역으로 충원됨으로써 국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승기념관에선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조선인민군과의 전투 속에서 총 한 번 쏴본 경험이 없는 어린 학도병들이 어떤 애국심과 용기를 보여주었는지도 확인이 가능하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공적 인정이 있었고, 여기에 더해 최근엔 장사상륙작전의 전공을 기리는 기념관까지 세워졌음에도 어째서 참전 노병들에 대한 훈장 추서와 수여는 지지부진한 것일까.

 

△ “훈장 추서와 수여? 이젠 지쳐 기대도 하지 않지만…”

지난달 류병추 회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서운함과 허탈함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과의 청와대 오찬이 열린 다음해 육군본부에서 사람이 찾아왔더라. 내가 그랬다. ‘훈장이란 전쟁 당시에 공훈을 세우면 주는 건데, 세월이 이렇게 흐르고 나서야 찾아왔는가? 훈장을 줄 것 같았으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나, 정일권(한국전쟁 당시 국군 총참모장) 소장이 줘야했던 게 아니냐’고. 이후 내가 관련 자료와 책을 주고, 이야기도 여러 차례 나눴으나 지금까지도 서훈 추천 문제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이젠 지쳐서 기대도 안 한다.”

2020년 류 회장과 만난 한국전쟁 참전군인 서훈 추천 담당 육군본부 사무관과의 통화를 통해 전후 상황을 물었다.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에 관해선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서훈 추천을 검토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분들이 훈장을 추서 받거나 수여 받지는 못했다. 국회 차원의 특별법 추진 등이 과거에 논의 됐다고는 들었는데…”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앞서 언급처럼 류병추 회장을 비롯한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과 청년지원병들은 작전이 끝나고 조치원함에 실려 부산으로 철수한 이후에도 군대에 남아 한국전쟁이 휴전될 무렵까지 여러 전투에 투입됐다.

류 회장은 경북 영천, 강원도 홍천과 춘천, 경기도 청평까지 행군하며 군인으로 복무했다. 그의 예편 일자는 1953년 4월 22일.

장사상륙작전 전우인 이영희(전 옥천군 교육장·91)씨와 배수용(한국전쟁 참전 유공자회 경북도지부 고문·99)씨 역시 국군 2군단과 3군단에서 전투병과 작전병으로 짧지 않은 기간 군대 생활을 이어갔다.

가장 빛나는 청춘시절 2~3년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바친 학도병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연필 대신 총을 들었던 그들은 ‘군번 없는 학도병’으로 입대해 ‘군번을 가진 국군’으로 끔찍하고 비극적인 한국전쟁을 치러냈다.

미국은 국가에 헌신한 군인들의 유해를 외국에서 국내로 송환하는 일에 수십 년째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이는 ‘나라를 위해 죽은 이들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의 국회와 국방부는 이런 의지를 보여주면 안 되는 걸까.

현재까지 살아남은 20여 명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왜 우리의 전투는 그토록 오랜 기간 국군의 역사에서 잊혀졌던가.” 이젠 노병들의 물음에 국군통수권자가 답해야 할 때가 아닐까?

 

작전을 마친 뒤 구조선에 오르는 독립 제1유격대대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영덕군 제공
작전을 마친 뒤 구조선에 오르는 독립 제1유격대대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영덕군 제공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가 올린 전과(戰果)

장사 해안 주요거점 200고지 점령… 북한군 병력 분산에 혁혁한 功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부대인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는 전체 인원 중 8할이 10대 후반의 학도병으로 구성됐다. 1950년 9월 15일 장사해변 전투에서 처음으로 총을 쏴 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순정한 애국심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젊음의 열정은 잘 훈련된 베테랑 군인들 못지않았다.

이종훈의 ‘무명용사의 열혈전투실기’ 등엔 “해안에 상륙을 완료한 독립 제1유격대대는 15일 오후 3시경에 장사동 해안지역의 주요 거점인 200고지를 점령했다. 유격대는 39명의 적을 사살하고 3명의 포로를 생포했으며, 9곳의 토치카(진지)를 파괴하고 직사포 2문, 포탄 450발, 지프차 1대, 기관총 45정, 로켓포 1문, 다발총 5정, M1총 9정, 소련제 장총 12정, 박격포 1문, 그리고 다량의 실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학도병들의 전투 행적이 드러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행된 논문에도 이 부분이 인용됐다. 이에 더해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은 참전 학도병과 청년지원병의 전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전 기간 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인명 손실을 겪었지만, 적 270명을 사살하고 학살 직전의 청년 1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기만으로 북한군을 분산시키고, 심리적으로 위축시킨 전술은 대성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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