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노태우 전 대통령이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5일간의 국가 장을 치르고 파주의 어느 사찰에 안치되었다. 광주 5·18 단체와 민주화 운동 기념단체는 그의 국가 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일부에서는 대통령 재임 시의 여러 공적을 내세워 국가 장을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그의 국가 장 찬반 논의는 그의 대통령 재직 시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있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을 덮고 난후에 판단해야 한다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엇갈리고 있다.

얼마 전 윤석열 대선후보의 전두환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정치권을 매우 소란스럽게 하였다. 윤 후보의 단순 발언의 실수인지 강보수층을 향한 선거 전략인지는 알 수가 없다. 노 전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12·12 쿠데타의 공동 주역인 그의 평가와 직결된다.

이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보다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념이나 진영논리가 아니라 그의 업적에 따라 냉정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의 궤적에는 누구나 빛과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 재직 시의 공적부터 살펴보자. 우선 그는 군 출신 대통령이면서도 통일과 안보와 직결된 북방외교를 과감히 추진하였다. 그는 1988년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7·7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1989년 공산국가 헝가리와 수교하고, 소련·중국과도 과감히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를 토대로 1991년 9월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을 성사시켰다. 그의 재임 시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선포하여 대한민국 통일 정책의 기본이 되었다. 급기야 1991년 12월에는 남북의 ‘남북기본합의서’까지 채택되었다. 당시 반공 보수 강경 분위기에서 북방외교의 초석을 다진 것은 그의 외교적 큰 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아직도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그의 국가 장례와 국립묘지 안장을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전두환과 함께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한 혐의로 내란죄로 22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정권 탈취 과정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은 아직도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재임 중 2천600여억 원의 사실상 뇌물인 비자금을 조성한 것은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그는 당시 직선제 대통령이 되었지만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고문과 탄압으로 아직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는 국민 모두가 존경하는 대통령을 한 명도 갖지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내란죄와 뇌물, 북방외교 성과라는 두 개의 얼굴이 공존한다. 사람의 평가는 공칠과삼(功七過三)만 되면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공(功)은 과(過)를 덮기에는 역부족이다. 그의 빛은 그림자를 덮지 못하고 있다. 그의 아들이 몇 해 전 광주를 찾아 부친의 죄과에 용서를 청한 적이 있다. 가족이 밝힌 유서에서도 ‘자신의 과오’에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은 있다. 그러나 그는 생시에 광주 5·18에 관한 진정한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난 ‘보통사람’ 노태우의 명복을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