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수 영

내가 자는 작은방 머리맡에는 오동나무 장롱이 하나 있다. 장롱을 만든 나무는 할머니의 태를 묻은 나무로 할머니의 할머니가 뒤뜰에 심은 나무였다. 베어져서 오랫동안 그늘에 마른 뒤 대패에 몸을 맡겨 뒤틀리고 마른 자리 다 깎여나간 채, 결 고운 오동나무 장롱이 되어 할머니가 시집올 때 우리 집에 실려왔다. 이불장과 큰 서랍 두 개 작은 서랍이 세 개인, 아버지보다도 나이를 더 먹은 장롱은 아직도 내 머리맡에 서 있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아무도 몰래 장롱 속으로 기어들어가 긴 꿈을 꾸며 잠이 들어버리는 통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기도 했다. 다음날 꿈 이야기를 하자 할머니는 말없이 웃으셨다.

혼자 있을 때 장롱을 뒤지며 노는 내게 장롱은 오래된 향기와 빛으로,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늙은 여자들이 이야기를 해준다.

자기 집 오래된 오동나무 장롱에 담겨져 있는 얘기를 요곤조곤 들려주는 정겨운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출산과 안방 살림살이에 대한 사연 등 집안 여인네들의 내력이 꼴싹하게 담겨져 있고 훈훈한 가족사에 담겨 흐르는 진한 모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네 인생살이 속에도 누구나 저런 오동나무 장롱 하나쯤은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