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한동<br /><br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건국일은 1919년 4월 13일이냐? 1948년 8월 15일이냐? 건국절 논쟁이 다시 재개될 기미가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언급했다. 보수 진영에서는 대체로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을 건국의 해로 보고, 진보 진영에서는 1919년 임시 정부 출범을 건국의 해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을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보는지, 혹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됐다. 양쪽 다 주장의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1919년 임시 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부터 살펴보자.

당시 상해 임시 정부는 불완전한 행태이지만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자존심은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 정신을 계승할 뿐 아니라 일제 식민 역사도 9년이나 단축시키는 명분도 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임시 정부는 이승만도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참여하고, 김구 등 임정 대표들도 참여한 통합 정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당시 임시 정부는 영토와 국민이라는 요소는 갖추지 못했지만 내국인과 연통되고 선언적 의미지만 납세와 병역의 의무까지 강령에 담아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외교적으로도 레닌의 소련도, 손문의 중국도, 에스토니아도 임시 정부를 주권 국가로서 인정했다. 현행 헌법에도 3·1 독립 정신과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규정하고 있지 않는가.

한편 1948년을 건국 기념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내외에 선포하고 국민, 주권, 영토라는 국가의 구성요소를 완벽하게 갖췄기 때문이다. 분단 상황에서 수립된 단독 정부이지만 유엔은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임을 인정했다. 정치학적으로 국가의 건국 모습을 실질적으로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1948년 광복절을 건국절로 간주해 기념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1919년 건국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으므로 1948년을 건국해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건국절 논쟁은 쉽게 합의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양쪽 주장의 밑바탕에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적 속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란 일종의 신념체계이며 세상을 보는 자기 안경이다. 이 건국의 기년(紀年) 문제도 자신의 이념성향에 직결돼 있다. 양측은 상호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에 어느 한쪽도 양보하기는 힘들다.

논쟁을 지켜보던 역사 사회학자 신용하 교수는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 시작해서 1948년 완성했다”고 절충안을 내고 있다. 다른 학자는 대한민국 건국은 명분상으로는 1919년이 맞고, 역사적 사실은 1948년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하루아침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쟁취과정이다. 그러므로 1919년이 건국의 출발이라면 1948년은 건국의 중간 결과물이다. 북쪽의 반을 남겨둔 완전치 못한 건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먼저 우리는 양쪽의 주장을 모두 인정하고 상호 존중해줘야 한다.

상해 임시정부가 30% 건국했다면 이승만의 정부 수립은 80%의 건국을 이룬 것이다. 지금처럼 건국을 둘러싼 친일과 항일, 애국과 매국이라는 비난은 즉각 중지해야 한다. 여기에는 결국 역사 교과서 문제의 쟁점까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국 관련 편 가르기는 상호 갈등만 증폭시키므로 소모적 논쟁은 즉각 멈춰야 한다. 이제 우리도 정권에 따라 역사 평가가 달라지는 아이러니도 극복해야 한다. 건국절 문제는 어느 것이 민족의 자존심과 국가의 정통성에 부합하는지를 판단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최소한 건국 논쟁에 정치인들의 개입은 자제해야 한다. 역사의 해석 문제는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