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 원

뻑뻑한 청바지 지퍼에 양초를 칠했더니

이제는 앉았다 일어서기만 해도

저절로 열리 때가 있다

잘 길들여졌다

지퍼가 나에게 내가 지퍼에게

잘 길들여진 삶이란

말 잘 듣는 관계란 언제나

잘 열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것

부드럽게 열리는 시간이 나를 지배한 적도 있지만

익숙하게 열리고 닫히는 지퍼처럼

누군가에게 가깝게 다가가 내 마음을 열어준 적이 있지만

그래도 닫히기 위해 지퍼는 존재한다는 것을

톱니와 톱니의 맞물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내 마음이 닫히기까지는

일상 속의 지퍼를 모티브로 삼은 재밌고, 곱씹어 봄직한 의미를 내재한 작품이다. 청바지의 지퍼가 길이 잘 들어 나중에는 저절로 열리는 일도 있듯이 사람 관계도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나를 지배하고 관계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익숙하고 편한 것이 반드시 우위의 가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힘으로 톱니와 톱니가 맞물려 있고 당겨줄 때 가치 있는 지퍼가 되듯이 우리네 인간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