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3세… 1949년 18세 입대 후 서울수복작전 등 6·25 전쟁 수훈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로, 한평생 해병대 발전과 후배 양성에 앞장
해병대 관계자 등 500명 참석 영결식… 각계각층서 마지막 길 배웅

최강의 군인이 되고자 했던 해병대 1기 이봉식옹의 영결식이 24일 엄수됐다. 그의 유해는 영결식 이후 포항시립화장장으로 이동해 화장한 뒤, 국립영천호국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포항해병대의 산 증인이자 ‘인천상륙작전의 전설’인 해병대 1기 이봉식(93·포항시)옹이 24일 영면에 들었다.

이봉식옹은 지난 22일 노환으로 93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24일 영결식은 포항시 양덕동 금강사 추모관에서 열렸으며 주일석 해병대 1사단장, 김헌 해병대교육훈련단장, 해병대 관계자 및 해병전우회원 등 50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포항시해병대전우회장(葬)으로 엄수된 영결식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시작으로 묵념과 고인에 대한 약력 보고, 훈장추서 순으로 진행됐다.

고인의 유해는 영결식 이후 포항시립화장장으로 이동해 화장한 뒤 양덕동 금강사 추모관에 임시로 모셔졌다. 조만간 국립영천호국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아들 이기홍씨는 “2022년도에 아버지께서 ‘아들의 첫 직장을 응원한다’며 잠실야구장에서 시구를 하는 늠름한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면서 “자식, 손주들과도 항상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는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셨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해병 장병들과 해병대전우회, 원로회, 특우회 회원들도 자리를 지키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고한중 포항시 해병대 전우회장은 고인에 대해 “평소 해병 전우회 활동을 활발히 하셨고, 해병대 홍보와 후배 양성을 하며 여생을 보내셨다”며 “전우회에서도 원로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해병발전을 위해 가장 큰 역할을 하신 분”이라며 회상했다.

3일장으로 치러진 고인의 장례식장 빈소에도 각계각층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특히 수십 여명의 현역병들도 빈소를 방문하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해병대 장교 A씨는 “자랑스러운 선배님이 하늘의 별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왔다”면서 “나도 후배들에게 자랑스러운 군인이 돼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고 말했다.

빈소 내부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이강덕 포항시장, 김계환 해병대사령관, 정종범 해병대 제2사단장, 강석호 자유총연맹 총재 등이 보낸 조화가 자리했다.

 

이봉식옹의 생전 모습.  /김훈 사진작가 제공
이봉식옹의 생전 모습. /김훈 사진작가 제공

1931년 2월 19일 충북 보은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8세가 되던 해인 1949년 4월 15일 해군에 입대한 후 해병대을 자원 1기로 계급장을 달았다.

그는 1950년 9월 해병대 제1연대 3대대 10중대 1소대 1분대장으로서 12명의 분대원을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고인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함상 갑판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파이프를 문 채 참모들과 작전을 논의하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직접 봤다”며 회상하기도 했다.

이 옹은 중동부전선인 가리산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쇄골을 부상당하고도 4개월 만에 원대 복귀를 자청해 1951년 6월 양구 도솔산 전투에 참전했다.

당시 인민군이 점령 중이던 24개 고지를 되찾는 승리를 거뒀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 친필 휘호를 받았다. 또 인천상륙작전 전에 1950년 8월 해병대 단독 작전이었던 통영 상륙 작전에도 참전했다.

이 밖에도 서울수복작전 등 6·25전쟁의 주요 전투들에 참전한 이 옹은 이후 해병대 신병훈련소 훈련교관으로서 후배 해병을 양성하다 1962년에 전역했다.

한편 경북매일신문은 전역 후 포항에서 60년 넘게 살아온 이 옹의 해병대 군 생활 경험과 해병대 역사에 관해 구술한 내용을 5회에 걸쳐 연재했었다.

최근까지도 고인은 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회 경상북도 지부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지난해 6월에도 포항 해병대 1사단을 찾아 강연하고 후배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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