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상주 판곡리 낙화송(落花松) 노거수

한 집안의 비극적 역사를 지켜본 상주 화동면 낙화송(落花松) 노거수.

내가 왜 노거수를 찾아다닐까? 하고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나무 실체의 아름다움에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어 감정이 이입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가 다 똑같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똑같아 보이는 나무일지라도 사는 위치, 나이, 생김새 등 삶의 꼴이 모두 다르다. 나무를 찾아서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 희로애락에 춤추며 좋아하기도 하고 절규하며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한 그루의 노거수를 이해하고 품는 것은 한 권의 양서를 읽음과 다름이 없이 삶의 영혼을 살찌게 한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마을이라면 얼마나 삭막할까, 나무 한 그루 없는 집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울까. 나무 한 그루 없는 도로라면 얼마나 심심하고 무료할까. 새들이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려 해도 앉을 자리가 없고, 바람이 먼 곳에서 찾아와 좋은 소식을 전해 줄래도 멈추어 쉴 자리가 없다. 도로를 따라 열 지어 서 있는 가로수는 차들을 인도하고 운전자와 동승자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며 심심함을 덜어준다.

인공으로 심은 나무라면 식목담이라는 태생의 이유를 다 가지고 있다. 그것이 노거수라면 도서관에 소장된 역사책처럼 나이테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을 것이리라. 쉬어가고 붙잡아 둘 노거수가 있는 집과 마을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또 나누고 싶다.

50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한 집안의 절부(節婦)들이 울부짖는 영혼을 잠재우는 낙화송(落花松) 노거수가 있다기에 단숨에 찾아 나셨다.

 

여인들이 왜군 피해 몸 던졌다는 ‘낙화담’ 한가운데 뿌리 내린 소나무
험난한 생육환경서도 550년 버티며 키 13m·흉고 둘레 2m 크게 자라
왜란 속 의병장 김준신의 활약과 가족 몰살 뼈아픈 역사 잊지 말아야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마을 423번지에 낙화담(落花潭) 한 가운데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낙화담은 조선시대 초기 만들어진 연못으로 임진왜란 때 여자들이 왜군을 피해 이곳에서 투신하면서 낙화담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면적이 190㎡로 채 60평이 안 되는 작은 연못이지만, 당시에는 매우 컸다고 한다.

낙화담 연못 가운데에 있는 낙화송 노거수는 아름다운 꽃이 떨어진다는 이름에서부터 슬픔이 묻어난다. 키 13m, 흉고 둘레 2m, 수관 폭 20m에 이르며 나이는 550살이나 되었다.

열악한 환경임에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연못 한가운데 흙으로 조그만 동산을 쌓아 그곳에 소나무를 심어놓았다. 큰 화분에 담겨있는 분재형 소나무 같다. 뿌리가 더 이상 옆으로 뻗어나갈 수 없어 나이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만, 연륜과 아름다움만큼은 어느 소나무 노거수 못지않다.

마을 주민들은 소나무 노거수를 마을의 수호목이자 상징물로 여겨 소중히 보살피고 있다. 나라에서도 1982년 10월 26일 보호수로 지정하여 정성껏 보호하고 있다. 판곡리 마을 청도김씨(淸道金氏) 집안 절부의 영혼을 위무하고 품어주는 낙화송이 위대해 보인다.

오늘날 장례문화 중의 하나인 수목장의 시초가 아닐까. 전쟁의 비극은 전쟁에 참여한 의병이나 장수만의 문제가 아닌 한 집안을 몰살하는 참담함임을 낙화송은 말하고 있다. 한 마을의 절부들이 울부짖는 원혼을 품고 있는 낙화송 노거수를 추모의 마음으로 천연기념물 반열로 품격을 올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낙화담 연못 한가운데 있는 노거수로 들어갈 수 있게 철제 다리로 연결해 놓았다. 마을 주민들이 선물한 지팡이 10개를 짚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낙화담 주변에는 아픈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아니 잊지 말라고 의사 제단 비, 위령비, 의적 찬양 시비, 제실 등을 짓고 의병장 김준신과 절부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있었다. 낙화송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위령 나무로 그 어느 문화재보다 값어치 있고 정감이 갔다.

낙화담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역사의 아픈 사연을 오늘날 곱씹어 본다.

‘김준신은 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당시 상주 목사 김해를 찾아가 방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하다가 오히려 유언비어로 세상을 어지럽힌다고 하여 감옥에 갇혔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다급해진 목사는 기병 백여 명을 내주면서 먼저 출전케 하고 자신은 나중에 뒤따르겠다고 했으나 남쪽에서 도망쳐 오는 난민들을 왜적으로 오인하고 발길을 되돌리고 말았다. 칠곡 석전에 이르러 원군을 기다리던 김준신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체할 수 없어 부하들을 이끌고 대구 인근까지 진출했다. 이때 왜군은 이미 대구를 함락하고 금호강을 건너 북상하는 중이었다. 황급히 상주 본진으로 되돌아와 북천전투에 참여하여 수백 명의 왜적의 목을 베고 임진년 4월 25일 32세의 나이로 장렬히 순직했다.

큰 피해를 당한 왜군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40여 리 떨어진 이곳 판곡리까지 쳐들어와 그의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때 부녀자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입향조가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파 놓았던 못에 투신하였다. 훗날 유림의 발의로 김준신의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정조(正祖)가 의사(義士)로 칭하였고, 1820년 순조는 통훈대부 사헌부 종3품의 집의로 추증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1973년 ‘낙화담의적천양시(落花潭義蹟闡揚詩)’를 짓고 일초 김현승 선생이 쓴 시비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절사곡(節士谷) 피 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 설악산 높은 봉에 본대로 이르는 말//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았다고/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아들 이야기가 낙화담과 함께 문중의 문집에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구사일생으로 김준신의 아들은 목숨을 건졌다. 난이 평정된 뒤에 아들 백일은 아버지가 전사한 곳을 찾아가 밤낮으로 울며 아버지의 유해라도 찾으려 하였으나 알 길이 없었다. 아들 백일은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축수하기를 ‘아버님 돌아가신 자리이거든 제가 든 이 술잔을 엎어 주십시오’ 하고, 제사에 들일 잔을 들고 다녔는데, 상주 서문의 토성 근방에까지 갔다. 그때 바람 한 점 없었는데 갑자기 잔이 엎어졌다. 백일은 드디어 그 자리의 흙을 파서 그 땅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시묘살이 했다. 그 슬퍼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하늘이 아버지의 충혼과 아들의 효성에 감동한 탓이다’ 하고 다들 기이하다고 여겼다 한다.”

낙화담, 첨모재, 위령비, 시비, 낙화송은 모두 우리의 문화재이다. 특히 살아 숨 쉬는 낙화송 노거수에 정이 더 감은 무엇 때문일까. 의병장 김준신의 위국충절과 아들 백일의 효심, 낙화담에 뛰어내린 판교리 절부들의 원혼 때문일까.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분께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기원해본다.

 

낙화담(落花潭)이란 명칭은

낙화담이 자리한 곳은 마을을 개척할 때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 뒤쪽은 산이 감싸 찬바람을 막아주고, 앞은 훤히 트여 양지바르며, 들은 크지 않지만 땅이 기름져 수십 가구가 먹고살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멀리 보이는 백화산의 뾰족한 봉우리가 화기(火氣)를 머금고 있어 오랜 세월에 걸쳐 발복(發福)할 수 없다고 하여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마을 한복판에 커다란 못을 팠다고 한다. 제아무리 강한 불꽃이라도 이 정도의 물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때 마을 여자들이 왜군을 피해 이곳에서 투신하면서 낙화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