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봄의 세상 매화 만발한 순천 여행

금둔사

매화는 봄을 알리는 꽃이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피어 강인함과 지조를 상징하기도 하고, 기품 있는 자태로 고고함을 대표하기도 한다.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봄의 상징과도 같은 매화가 전남 순천의 산사와 마을에 수줍게 피었다. 어느덧 봄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

매화에 관한 우리 민족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왕 24년 항목이다. 삼국유사 제3권 아도기라(阿道基羅) 맨 끝부분엔 “모랑댁(毛郞宅) 매화꽃 먼저 피게 하였네”라는 글이 나온다. 매화가 당시 귀족들 사이에 정원수로 심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여러 세기에 걸쳐 매화는 귀한 꽃으로 대접받았다.

날이 아무리 변덕스러워도 이제 봄이다. 봄의 전령 매화를 찾아 봄나들이를 떠나보면 어떨까?

 

수백 년 꽃 피워낸 고목이 있는 선암사
홍매화서 청매화까지 ‘선암매’에 흠뻑

금둔사 곳곳에 피는 소담한 매화나무
일찍이 꽃망울 틔워 ‘납월매’라고 불려

두 그루 홍매나무 중심 ‘탐매 마을’ 조성
이름처럼 ‘매화 핀 경치 구경하는’ 마을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 ‘순천복음교회’
만개한 15종의 매화향 은은하게 풍겨

◇선암사의 선암매와 금둔사의 납월매

이른 봄, 글 읽는 선비들이 도포 자락을 날리며 매화를 찾아나서는 여행을 ‘탐매(探梅)’라 했다. 매화 핀 경치를 찾아가 구경하는 탐매는 그저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 애틋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담긴 여행이다. 사군자 중에서도 매화를 맨 앞에 두었으니, 혹독한 겨울을 지나 도도하고 단아한 자태를 드러낸 매화 한 송이는 고매한 군자를 대하는 것과 같았으리라.

순천 매화 여행의 시작지는 선암사다. 선암사의 매화는 ‘선암매’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린다. 수백 년 동안 꽃을 피워낸 고목이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돼 있다. 매서운 겨울 추위를 견디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나무들이 종정원 담장을 따라 고운 꽃그늘을 드리우며 만개했다.

매화가 핀 또 다른 산사는 금전산(金錢山) 금둔사(金芚寺)다. 금둔사는 순천의 대표적 사찰인 선암사나 송광사에 가려진 한적한 사찰이지만 ‘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금둔사 곳곳에 피는 소담한 매화나무들 때문이다. 금둔사의 매화는 ‘납월매’라고 불린다. ‘납월’은 음력 섣달(12월)을 뜻하는 말로, 그만큼 일찍부터 꽃망울을 틔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남도에서도 가장 일찍 피어나는 매화나무 중 하나라고 한다.

‘납월홍매’라고 불리는 분홍빛 홍매화들은 이르면 1월부터 꽃을 피우기도 한다. 홍매화가 지기 시작하면서 하얀 팝콘 같은 청매화들이 톡톡 올라온다.

선암사와 금둔사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추천할 만한 곳이 순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낙안읍성이다. 성안에 300여 동이 넘는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낙안읍성에는 곳곳에 매화가 있다. 낙안읍성의 매화는 자연 속에서 저 홀로 피는 게 아니라 마을과 사람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피고 진다. 낙안읍성의 매화는 초록 기운 가득한 밭 두둑에서, 초가지붕의 민가 마당에서, 봄비에 젖은 장독대 곁에서 핀다. 매화와 함께 노란 산수유도 함께 핀다. 여기서 보는 매화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만 따로 보는 게 아니다. 매화가 피어서 비로소 완성하는 봄의 풍경을 총체적으로 감상하는 게 요령이다.

 

분홍빛 홍매화가 핀 금둔사를 찾은 관광객.
분홍빛 홍매화가 핀 금둔사를 찾은 관광객.

◇탐매마을에 화사하게 핀 홍매화

깊은 산사에만 매화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전남 순천 원도심 골목의 오래된 주택에 홍매화 두 그루가 의연하게 서 있다. 산사의 매화도 아직 절반밖에 피지 않았는데 이곳 홍매화는 이미 만개해 마을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홍매화가 핀 집은 ‘홍매가헌(紅梅佳軒)’이란 현판이 달려 있다. ‘붉은 매화가 아름다운 집’이란 뜻이다. 순천대에서 정년퇴직한 김준선 교수가 3대를 이어 살고 있는 집이라고 한다.

해마다 일찍 피어 그윽한 향기를 뿜는 김 전 교수 집 정원의 두 그루 홍매나무가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마을의 값진 자원이 됐다. 두 그루의 홍매나무를 중심으로 순천의 원도심 매곡동에 ‘탐매(探梅) 마을’이 조성됐다. 이름처럼 ‘매화 핀 경치를 구경하는’ 마을이다. 남도 땅에 매화 한두 그루 없는 동네가 있을까. 하지만 매곡동 매화는 존재감이 남다르다. 두 그루 홍매화에서 시작한 꽃불이 동네에 심은 매화나무로 옮겨붙게 된 것이었다. 마을 곳곳에는 홍매화가 피고, 골목마다 미술 마을 프로젝트로 그리거나 설치한 매화 그림, 조형물이 들어섰다.

똑같은 꽃이라도 봄에 저 홀로 이르게 피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 여린 꽃이 알리는 봄의 도래는 또 얼마나 감동적인가. 매곡동 주택가의 홍매화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진작 붉게 피어나서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탐매마을매화
탐매마을매화

◇순천복음교회의 매혹적인 매화정원

순천시의 외곽 왕지동에 있는 순천복음교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매화 명소가 있다. 교회에 웬 매화인가 싶겠지만 교회 마당에 연못과 개울을 놓고 매화정원을 조성했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매화정원은 2년 전 순천복음교회를 은퇴한 양민정 목사가 30년에 걸쳐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교회 정원에는 동백과 소나무, 산다화 등 300여 그루의 나무가 있다. 그중 절반이 매화나무다.

대형 수목원이나 매실 농장에다 대면 규모가 크지 않아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막상 매화정원에 들어서서 은은한 매화향을 맡으며 꽃을 감상하다 보면 이른 봄을 누리기에 이만한 호사가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매화는 고즈넉한 절집에 어울린다 싶었는데,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와도 썩 잘 어울린다.

매화에 대해 지식이 부족한 이들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홍매, 백매, 청매, 오색매 등 명패를 붙여 놓았다. 매화가 15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이 꽃받침이 초록색을 띤 청매다. 흑매는 홑겹의 붉은 꽃이 너무 붉어서 검게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수령 100년이 넘는 고매(古梅)도 있다. 정원에 있는 고매만 38그루나 된다. 강원 영월에서 가져왔다는 복음매와 전남 영암에서 데려왔다는 백매, 장흥에서 가져온 홍매는 모두 수령이 200~300년은 족히 넘는 늙은 매화다.

매화의 종류가 많다 보니 이제 겨우 움이 튼 것도 있고 벌써 만개해 화사해진 것도 있다. 매화정원의 매화들이 만개할 때는 3월 초라고 하니 공들여 찾아가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듯하다.

순천 월등면에는 매실 농장으로 가득한 산골 마을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계월리 향매실 마을이다. 봄이 무르익으면 마을 전체에 ‘꽃 사태’가 난다. 월등면의 매실 밭은 주로 평지에 펼쳐져 있어 비탈에 자리잡은 섬진강변의 매실농원 풍경과 닮은 듯 다르다. 산자락을 따라 자리한 마을이 하얀 매화로 구름바다를 이루는 듯하다. 월등면의 매화는 섬진강 매화가 시들 무렵부터 피기 시작하니 늦은 봄나들이에 딱 좋은 곳이다.

/순천=글·사진 최병일 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