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내가 국립국어원장으로 일하던 때였던 2006년, 당시 한국시인협회에 전국시인들이 고향 방언으로 창작한 시를 묶은 방언시집 출간을 요청하였다. 현대시 100주년인 2007년을 기념하는 차원이었다. 국립국어원의 뜻밖의 요청에 시인들은 놀라워하면서도 크게 반겼다. 반면 국어학 연구 교수들은 방언시집 발간이 국립국어원의 역할인가 의문의 눈초리를 보냈다. 강한 거부의사도 서슴치 않았다. 모 대학 교수는 국립국어원장이 표준어의 어문정책을 파괴하는 행위를 한다며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원장 파면을 선동하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조는 확고했다. 시인은 새로운 언어의 창조자다. 방언은 표준어 이전의 모국어이자 모태어다. 시를 통해 모국어를 보다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국어의 언어다양성을 지키고 지지하는 것 또한 국립국어원의 역할이자 의무라는 논거로 이 사업을 지원했다며 당당히 맞섰다.

사실 국립국어원은 국어의 발전과 국민의 언어생활을 향상하는 연구 사업을 추진하고 체계적인 정책 수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기관이다. 합리적인 국어정책 추진에 필요한 체계적 조사와 연구를 하며, 언어 규범을 보완·정비하는 목적을 가진 기관이다. 그런 점에서 기본언어는 표준어가 맞다. 그러나 국가 언어 자원을 수집하여 통합 정보 서비스를 강화함으로써 국민 언어생활의 편익을 증진한다는 또 하나의 기본 목표가 있다. 국가의 언어자원에는 방언이 큰 몫을 한다. 모국어를 보다 풍성하게 살리려면 표준어 관리도 중요하지만 지역 방언도 중요하다는 국어정책의 기본을 안다면 이 얼마나 필요충분한 사업인가. 정제된 언어인 표준어를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역 방언을 되살려 표준어의 경계와 범주를 확대하는 것 또한 중차대하다. 특히 넘쳐나는 차용외래어의 환경과 무분별하게 생성되는 신조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말을 온전하게 지키는 언어생태환경 조성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안이다. 방언이 표준어를 훼손하는 일이 아니라 언어 다양성을 존중하는 언어라는 것을 알리는 사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표준어를 신화처럼 여기던 국어학계에서도 말문을 닫았다. 국가언어정책의 기본 틀의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나는 사업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인 101명, 내 고향말로 시를 쓰다’라는 부제의 방언시집 ‘요 엄창 큰 비바리야 냉바리야’(서정시학)가 출간되었다. 토착 방언들로 지은 시 작품이 과거를 하나씩 호명하듯 기억의 거미줄에 걸려들었다. 방언이 섞인 시의 맛이 따뜻하고 신선하다는 평가들이 이어졌다. 환경과 기술의 빠른 변화 속에서 잊혀진 시간과 공간의 풍경들을 방언 시를 통해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며 반가워했다. 표준어의 위력에 억눌려 숨을 쉬지 못하고 있던 토속적인 감정과 그들 간에 유통되는 토속의 지식정보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방언으로 살아났다.

당시 국가 어문정책의 책임자인 나는 국어학자이면서 시인이기도 했다. 문학 작품 속에 깃든 방언을 문학 비평적 관점에서 연구한 ‘방언의 미학’(살림)과 ‘위반의 주술 시와 방언’(경북대출판부)을 간행하기도 했다. 나의 이런 연구가 시인들에게 방언으로 된 시 창작을 부탁하게 된 이유가 된 점도 없지 않다. 이후 국어국문학계에는 문학방언에 대한 연구 붐이 일어났다.

내친 김에 나는 언어다양성 정책을 학술적으로 지원하기로 하고, 2008년 한국언어학회와 공동으로 제8차 세계언어학자대회를 한국에 유치하였다. ‘언어의 다양성’을 주제로 자본의 우위와 식민지배로 인해 절멸해 가는 세계의 언어와 변두리의 방언 보전과 유지를 위한 국제협력의 장을 펼쳤다. 언어학자대회이지만 문학인들을 대거 초청하여 발표의 기회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또한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학어야 말로 언어의 존속과 창의적 변용을 통한 집단의 정체성과 지식정보 축적의 기본으로 한 언어의 다양성 보전의 첨병이라는 학계의 동의를 선언적으로 얻었다.

이 두 사업은 방언이 문화의 다양성 속에 창의성이나 독창성뿐만 아니라 개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자산이며 특히 지식정보 전달 매체인 언어와 방언이 지역과 계급적 차등과 차별을 뛰어넘는 기초가 된다는 나의 언어관을 실현한 매우 의미있고 기쁜 일이었다. 학자로서 그리고 시인으로 가장 보람된 일 가운데 하나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