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자료 사진을 찾으려 앨범을 뒤질 일이 생겼다. 내 삶의 이력마다 한복을 입은 적이 유난히 많음을 알았다. 70년대 대학졸업식, 여학생은 한복 위에 졸업가운을 입는 것이 당연했다. 은박무늬가 반짝이는 파란 공단치마에 하늘색 저고리는 당시 유명한 화장품 모델의 한복을 그대로 베낀 옷이었다.

내 한복 이력의 하이라이트는 웨딩드레스다. 결혼식장을 정하니 식장에서 신부옷을 무료로 빌려준다고 했지만 희어야 할 웨딩드레스는 하나같이 우중충한 잿빛이었고 여러 사람이 입어 때 탄 옷을 입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전문 웨딩샵의 웨딩드레스는 아름다웠으나 너무 비싸 이 역시 아니라 싶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폐백용 한복을 맞추러 간 서문시장 한복집에서 눈에 띄는 흰 한복감이 있었다. 하얀 본견에 우아한 철쭉꽃이 그려져 있었다. 꽤 유명한 한국화가가 그린 그림이란다. 그것으로 웨딩드레스를 짓고 싶었고 남편도 찬성했다. 한복집 사장님은 파격적인 가격으로 주겠다며 적극 추천했다. 한복을 맞춰두고, 면사포와 부케를 주문하러 다시 웨딩샵으로 갔다. 신부용품을 모두 무료로 대여해 줄 거고, 한복에 어울리는 부케와 생화족도리까지도 만들어 주겠다. 대신 결혼식 때 사진찍기를 허락해 주고 사진을 웨딩샵에 제공해 달라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불감청고소원이었다. 그 후 그 웨딩샵엔 나의 사진이 꽤 오랫동안 걸려있었다.

결혼식 당일, 한복을 입을 거니 너무 짙은 화장을 말라는 나의 요구에 신부화장도우미는 업신여기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나의 한복은 그 자리의 모든 웨딩드레스를 압도할 정도로 희고 눈부셨다. 부러움의 눈초리와 탄성에 좀전의 업신여김을 모두 보상받았다. 그 한복은 석사 졸업식, 큰아이 유치원 졸업식, 연주회에 초청 받거나 제법 격식을 갖춘 공연을 보러 갈 때도 파티드레스 삼아 즐겨 입었다.

엄마의 회갑연 때 맞춘 한복은 동생 결혼식과 대학원 박사학위 졸업식 때도 입었다. 북경세계여성대회에 가서는 국위선양을 톡톡히 했다. 꽃분홍 저고리에 수박색 치마의 화사한 한복 덕에 외국인들과 사진 찍느라 진땀을 뺐다.

십수년 전, 천연염색으로 들인 쪽물 옥사, 홍화물 모시, 감물과 녹찻물의 삼베 천을 주신 유복혜 선생님 덕에 내 한복의 리스트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풍성해지고 고급스러워졌다. 독일의 세계도서박람회나 브라질 한민족네트워크에 참석하여 한복의 맵시를 알렸다. 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열리는 외국인 초청 행사 때도 한복을 입었다. 한국인은 한복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내 모든 한복을 가지고 가서 한국인여성들에게 입히기도 했다. 쪽빛 치마 하나에 흰 저고리, 노랑저고리, 옥색저고리를 맞춰두면 세 벌이나 있는 셈, 이렇게 한복이 많으니 두 아들 결혼식 땐 따로 옷을 짓지 않아도 되었다.

며칠전 겨울용 누비치마저고리를 샀다. 꽤 도발적인 붉은 저고리와 검은 치마였다. 평소 내가 즐기는 색상은 아니었으나 늙을수록 고운 색을 입어야 한다는 지인의 조언에 귀가 얇아졌다. 오는 설날, 손주들이 한복차림으로 절할 때 이 누비한복을 입고 답례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