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

‘스즈메의 문단속’ 포스터.

죽음은 온전히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망자를 절차에 따라 떠나 보내고 남은 자리엔 ‘정리’와 ‘상실’의 과제가 남는다. 뜻하지 않은 죽음은 ‘만약(if)’이라는 후회와 회한의 절차를 반복한다. 그 반복적인 절차 속에서 상실은 옅어지고 삶에 대한 또 다른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그 무엇도 온전히 상실의 빈공간을 채우지는 못하겠지만 무뎌지고 잊혀지면서 상실의 아픔은 아물어간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은 바로 이러한 ‘정리’와 ‘상실’에 관한 영화다.

‘너의 이름은’에서도 그렇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꿈에서 시작된다. 반복되는 꿈, 그 속에서 미지의 궁금증은 증폭되어 간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꿈은 모두 과거의 어느 시점에 발생한 사건을 기점으로 한다. 꿈은 조금씩 조금씩 반복되며 진행된다.

꿈은 죽음과 맞닿아 있고, 그 죽음을 있게 한 원인과 연결된다. 원인은 재난이고 그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상실을 어떻게 극복하고 채워갈 것인가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2020년 1월 일본에 있었다. 포항문화재단의 재난을 문화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해외교류 프로젝트의 담당자로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던 후쿠시마 이와키시를 방문했다.

2017년 11월 15일 포항 흥해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한 시민들의 트라우마를 문화적으로 극복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고, 그 일환으로 일본에서 활동중인 단체와 교류를 추진하게 된다.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었지만 그날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지진해일로 인해 적지 않은 인명 피해를 입었던 이와키시는 여전히 피해 복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원전 피해 지역에 가까워질수록 당시의 흔적은 짙게 남아 있었다.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하루 아침에 사랑하던 이들을 잃었고, 살던 집과 동네가 쓸려 내려가는 모습이 각자의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동일본 대지진의 복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전작인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가 가상의 재난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스즈메의 문단속’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실제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피하거나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 심연의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기억을 직접적으로 끄집어 낸다.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만약이라는 가정을 끊임없이 반복해 보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지점에서 택한 방법은 과거의 상처를 직시하는 것이다. 물리적 피해복구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은 치유는 그 속도를 달리한다. 2020년 후쿠시마 이와키시의 방문에서도 피해복구와 다르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막연한 두려움과 긴장은 여전했었다.

영화는 애도와 치유의 방법으로 실제 일어났던 재난을 끌어온다.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지만 그것이 해답이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묻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살핀다. 잊으려해도 잊혀지지 않던 그날의 기억은 온전히 되살아나 눈앞에 펼쳐진다. 외면한 기억을 뒤돌아 마주했을 때,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혔을 때 황량했던 내면에 순풍이 풀고 꽃이 피어난다. 이유없는 재난 앞에서 스즈메의 이유를 찾기 위한 문단속은 계속되지만 사라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영화는 장면 장면마다 재난을 경험했을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요소들을 배치해 두었다. ‘만약(if)’의 문을 열고 닫으며 초월적인 존재의 능력을 갈구하지만 이미 발생한 재난은 돌이킬 수 없다. 각인된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영화는 손쉽게 위로하지 않는다. 타인의 위로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날의 기억을 직시하고 인정했을 때, 그곳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직간접적으로 재난을 경험했을 모든 이들에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닫음으로써 비로소 이후의 삶이 시작된다. 영화 속에서 이와키의 해변가에서 보았던 높은 방벽이 나왔을 때 울컥했던 마음과 함께 감정의 울림이 크게 여닫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잊어서 치유되는 것이 아닌 기억해서 아물어가는 상처의 치료 과정을 보게 된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