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티아고 길’ 기점·소악도 12사도길

기점·소악도 노두길
기점·소악도 노두길

프랑스 남부의 국경마을 생 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무려 800㎞를 걷는 순례길이 있다. 수많은 전 세계 여행자가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빠지는 극한의 고통을 견디며 사람들은 산티아고까지 걷고 또 걸었다. 순례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규모는 여기보다 훨씬 작지만 국내에도 마음을 순화시키는 아름다운 순례길이 있다. 일명 ‘섬티아고 길’이라고 불리는 전남 신안군 기점·소악도의 ‘12사도 순례길’이다. 가을이 시작되는 눈부신 계절 12사도의 이름을 딴 독특하고 예쁜 건축물을 찾아 신안으로 떠나면 깊은 감동과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기점·소악도는 맨드라미 200만 송이 붉은 장관 펼쳐진 병풍도에 딸려 ‘맨드라미섬’ 별명

12사도길은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딴섬 잇는 3개의 노두로 연결 1.7km 넘어

국내외 설치미술 작가들이 참여해 길 처음부터 끝까지 12곳에 세워진 각양각색 예배당

황금빛 양파지붕 ‘마태오의 집’·작은 호수 위에 떠있는 ‘바르톨로메오의집’ 인증샷 명소

기점·소악도 풍경
기점·소악도 풍경

◇예수의 12제자 이름을 딴 건축미술

배를 타고 가다 대기점도 선착장에 내리는 순간 그리스 산토리니풍의 하얀 건물이 보였다. 12사도 순례길의 시작점이자 오가는 배를 기다리는 공간이다. 건물은 한두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미니 예배당(기도소)과 작은 종탑, 그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된 단출한 구조다. 건물 사이에 낮게 매달린 작은 종을 울리자 청아한 종소리가 바다를 가르며 물밑으로 떨어졌다. 순례의 시작이다.

기점·소악도는 염전이 유명한 증도 옆 병풍도에 딸려 있다. 병풍도는 ‘맨드라미 섬’으로 불린다. 신안군이 주민들과 힘을 합쳐 약 2만㎡의 황무지를 꽃밭으로 탈바꿈시켰다. 약 200만 송이의 맨드라미를 심어 꽃동산을 만들고 맨드라미 거리도 조성했다. 집집마다 지붕을 빨간 색으로 칠했다. 꽃동산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풍경이 만화 같다. 병풍도는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등 작은 ‘새끼섬’을 거느린다. 이 다섯 개의 섬이 노두로 이어진다.

기점·소악도에 있는 12사도 순례길은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을 연결하는 길이다. 때론 섬을 관통하고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는 노둣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사색의 길이기도 하다. 병풍도,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를 잇는 3개의 노두를 다 합치면 길이가 1.7km가 넘는다. 지금은 말끔한 새 노두가 놓였지만 20~30년 전에는 “망태, 바지게 지고 돌을 날라 만든” 투박한 노두가 있었단다. 썰물 때 갯벌이 드러나면 새 노두 옆으로 옛 노두의 흔적이 드러난다.

 

요한의 집
요한의 집

이 길을 더욱 신비롭게 하는 것은 물이 차면 사라졌다가 약 3~4시간 뒤에 하루 두 번 물이 빠지면 길이 열리는 신안의 자연이다. 물때를 기다리며 걸음을 멈추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귀도 열린다. 싱싱한 갯벌도 눈에 들어온다. 신안갯벌은 서천 갯벌(충남 서천), 고창 갯벌(전북 고창), 보성-순천갯벌(전남 보성·순천)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신안 갯벌이 압도적으로 넓다. 노둣길과 함께 신비스런 풍경을 가졌다 하여 12사도 길은 기적의 순례길로도 불린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힌트를 얻어 ‘순례자의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지금은 섬티아고라는 애칭으로 더 익숙하다.

12사도길의 처음부터 끝까지 12곳에 세워진 각양각색의 예배당은 특정한 종교의 상징물이 아니다. 어떤 신을 믿든 절대자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성찰의 공간이다. 12개의 작은 예배당을 짓는 프로젝트에는 11명의 설치미술 작가가 참여했다. 국적은 제각각이다. 강영민, 김강, 김윤환, 박영균, 손민아, 이원석 등의 한국 작가와 장 미셀 후비오(프랑스), 파코(프랑스·스페인), 브루노 프루네(프랑스), 아르민딕스(포르투갈), 에스피 38(독일) 등의 외국 작가들이 힘을 보탰다.

신안군은 작가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해 교회를 어떤 형태로 만들든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예배당인데도 어떤 것은 성당을 닮았고 또 어떤 것은 러시아정교회처럼 둥근 지붕으로 세워졌다.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종교 간 화합을 건축으로 이뤄냈다.

교회를 세울 장소도 작가들이 직접 물색했다. 숲속과 언덕, 호숫가, 마을 입구, 심지어 밀물이 되면 물에 잠기는 노둣길 중간에도 작품이 세워졌다. 작가들은 섬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한국적인 소재를 건축물 속에 적극 활용했다. 돌절구, 구유와 연자방아의 받침돌 등도 건축 소재로 쓰였다.

 

베드로의 집
베드로의 집

◇교회 건축물에 녹인 섬사람의 삶

건축물을 만들며 작가들은 작품 속에 섬사람의 삶과 이야기를 녹여 넣었다. 12사도 순례길의 두 번째 교회인 ‘생각하는 집 안드레아’에는 양파 모양의 지붕에 고양이가 앉아 있다. 이곳 성소가 고양이를 상징물로 택한 이유가 있다. 30여 년 전, 마을이 들쥐로 인해 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자 쥐를 퇴치하기 위해 고양이를 섬으로 들여와 키우기 시작했다. 양파 모양의 지붕은 섬사람 대부분이 양파를 재배한다는 데 착안해서 건축물로 형상화했다.

논둑길 끝 고요한 숲 속에는 동화 속에 등장하는 오두막 같은 ‘그리움의 집(야고보)’이 있다. 소기점도와 소악도 노두 앞의 ‘행복의 집(필립)’은 프랑스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건축형태를 보여준다. 적벽돌과 갯돌, 적삼목을 덧댄 유려한 지붕 곡선과 물고기 모형이 독특하다. 소기점도 작은 호수에 떠 있는 ‘감사의 집(바르톨로메오)’은 전체가 유리로 마감됐는데 밤이 되면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온다. 전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증샷’명소다.

 

마태오의 집
마태오의 집

12사도 교회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장 미셀 후비오와 파코 작가가 만든 ‘필립의 집’이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 지방에서 온 이들은 고향의 붉은 벽돌과 섬에서 채취한 자갈로 교회를 세웠다. 섬 사람이 사용했던 돌절구는 둥근 창문이 됐고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잘라 얹은 지붕은 뾰족한 첨탑형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전통적인 나무배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실내 구조도 특이하다. 이곳에서 노둣길과 바다를 바라보면 계절과 시간, 물때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소기점도를 지나 소악도로 넘어가는 노둣길 중간에는 ‘마태오의 집’이 있다. 밀물이 돼 노둣길이 바닷물에 잠기면 교회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집이 된다. 마태오의 집은 황금빛 양파 지붕이 러시아정교회를 닮았다. 12개 예배당 중 최고의 포토존이다.

호수 위에 세워진 ‘바르톨로메오의 집’도 이색적이다. 저수지의 물을 사흘 동안 퍼내고 8개월이나 걸려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 풍경은 저녁에 특히 아름답다. 스테인리스 구조물과 스테인드글라스의 채색이 화려한 빛과 만나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12번째 제자이자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의 집’은 프랑스의 남부 도시 몽생미셸의 성당을 연상시킨다. 순례를 마칠 즈음 낙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햇살은 금가루를 뿌리며 산란하고, 갯벌은 몸을 뒤척이며 밤을 맞을 채비를 서두른다. 해는 분분히 바다 밑으로 자취를 감추고 12사도 교회도 어둠 속에 평안히 잠이 들었다.

 

가롯 유다의 집
가롯 유다의 집

여행수첩

신안 순례자의 길을 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신안군 지도읍 송도 선착장에서 병풍도 선착장으로 가는 배(25분 소요)를 이용하는 방법과 목포에서 가까운 신안군 압해읍 송공 선착장에서 소악도(40분 소요)로 가는 방법, 셋째는 송공 선착장에서 대기점도(70분 소요)로 가는 방법이다. 물때를 잘맞춰야 순례자의 길을 다 걸을 수 있다. 당일에 걸을 수 있지만 1박을 하고 차분하게 돌아보면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덤으로 즐길 수 있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