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황 인 ① 군 시절과 포항 동해중학교 부임

황인 향토사학자.

이 글은 필자가 포항 지역의 사학자 황인 선생과 나눈 다섯 번의 대담과 수차례의 통화 그리고 서면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당시 선생은 임플란트 시술 중이었고, 필자 또한 서울과 포항을 오가야 하는 상황이라 인터뷰가 순조롭지 않을 수 있겠다고 우려했으나 기우였다. 첫 만남의 대담부터 선생은 매번 두 시간이 넘도록 포항의 역사와 문화, 문화재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학자 E. H. 카의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개인 또는 사회가 자신의 역사를 잊거나 혹은 왜곡해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 개인과 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끊기고,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은 어떤가. 우리 지역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기억하고 기록하여 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다행히 우리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힘든 여건에서도 몇몇 분이 그런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향토사학자 황인 선생은 그들 중 한 명이다.

황인 선생은 1977년 포항 동해면 동해중학교에 부임한 이래 발굴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포항의 역사와 문화 유물,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탐사, 기록, 보존하고 전하는 일에 헌신해왔다. 선생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선생이 포항과 첫 인연을 맺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군 생활 중 대학 선배 소개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쳤지. 전국 검정고시 1등 배출 등 보람 느끼며 교사 꿈꾸게 됐어.

난 도시보다 조용한 시골이 좋았어. 특히 바다와 꽃을 좋아해 포항시내와 떨어진 시골학교인 동해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지.

우연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처음 역사교사로 부임해 반에 들어가 보니 ‘황보’ 성을 가진 학생이 유독 많은 거야. 그 아이들이 성동리에 조상인 ‘황보인’이라는 분의 비석도 있다는 데 눈이 번쩍 뜨였지.

여국현(이하 여) : 선생님께서 1977년 동해중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에서 국사학을 전공하셨으니 교사가 아닌 다른 길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교직을 선택하신 것과 당시로 보자면 낯설고 외진 동해를 첫 근무지로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황인(이하 황) : 대학 시절부터 교사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지. 그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어. 군에 입대해서 대구 의무사령부 군의학교에 있었는데, 한 대학 선배가 대민 지원사업으로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어.

여 : 그러니까 야학 같은 것이었군요.

황 : 그렇지. 그 선배가 제대할 때 교직을 이수한 내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자리를 내게 소개해준 거야. 지금은 없어졌는데, 효목고등공민학교에서 검정고시 과목을 가르쳤지. 1, 2, 3학년별로 교실 하나, 교무실, 숙직실 하나뿐인 작은 학교였어.

여 : 군대 생활도 힘들 텐데 일과 후 학생들을 지도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황 : 피곤하긴 했지만 학생들이 워낙 열심히 하고 잘 따라서 보람이 컸어. 학교가 지금의 동대구 고속버스터미널과 동부시외버스터미널 사이에 있었는데, 당시 11월에 치르는 전국 검정고시 합격률이 98퍼센트나 될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 게다가 운이 좋았는지 내가 가르친 그해 졸업생이 전국 검정고시에서 1등을 해서 졸업생 이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지원하는 부대 사령관 이름까지 떡하니 나왔지. 사령관도 기분이 좋았던지 별이 박힌 지프차를 타고 부하 장교들을 주루룩 데리고 학교에 찾아와 교사로 있던 부대원들을 격려했지.

 

그동안 모아온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는 황인 선생.
그동안 모아온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는 황인 선생.

여 : 학생들과 선생님이 얼마나 간절히 공부하고 열심히 가르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결과도 좋았으니 참 보람 있는 시간이었겠어요.

황 : 그랬지. 그때 나한테 배운 학생들 가운데 한 친구는 영국 유학을 갔고, 교사, 목사, 호텔 총지배인이 되기도 했어. 육십이 넘은 제자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같이 회를 먹고, 손자를 봤다고 찾아오기도 하니 정이 많이 들었지. 하여간 그때 가르치며 보람을 느꼈던 것이 나중에 교사를 하게 된 동기가 되었어. 그런 이유로 대학을 졸업하고 바다가 가까운 동해중학교로 오게 되었지.
 

여 : 어려운 상황에서 배우는 학생들이었으니 절실함과 고마움이 더욱 컸을 것 같습니다. 저도 포항제철에 다니면서 대학 생활을 했고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그때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느꼈을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그런데 대구나 포항 도심에서 근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텐데, 동해중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황 : 나는 그전부터 도시보다 조용한 시골이 좋았어. 특히 바다와 꽃을 좋아해서 학교를 정할 때 바닷가 근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사실 그때 동해는 포항과 한참 떨어진 데다 길도 포장이 안 되어서 한적할 거라 생각하고 지원했어. 당시 교장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교사가 시골 학교로 오겠다 하니 걱정이 되었는지 얼마나 있을 거냐고 먼저 묻더군. 그러면서 학교가 포항에서 오가기도 편하고 사람들 왕래가 많아 외진 시골이 아니라는 점을 유독 강조했지. 다른 교사들이 부임했다가 시골구석이라고 금세 떠나곤 했던 모양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오히려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좋아서 지원했다고 했더니, 그제야 이곳이 외진 데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더라고. 그렇게 해서 동해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

여 : 당시 학교생활은 어떠셨어요? 생각만큼 만족스러우셨는지요?

황 : 한적한 바닷가 학교는 나한테 더없이 좋았어.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면이 있기도 하더군. 학교 현실에서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때는 가난하던 때라 등록금을 잘 거두는 교사, 성적 잘 내고 결석 안 시키는 것으로 교사를 평가하니 내심 갈등이 없지 않았어. 하지만 인생이 어디 다 좋기만 하고 나쁘기만 한가. 좋은 것이 있으면 조금 맘에 안 드는 것도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지. 정년퇴직한 지금 그 시간을 돌아보면 교사로 일해온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지.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할 수 있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어.

 

문화유산 답사 현장에서 황인 선생.
문화유산 답사 현장에서 황인 선생.

여 :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은 포항에서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역사를 찾아내고 널리 알리는 것일 텐데, 그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사실, 맨 먼저 여쭙고 싶은 질문도 이것인데요.

황 : 계기라면 계기랄까. 우연이라는 게 참 이상하더라고. 내가 처음 역사 교사로 부임해서 반에 들어가 보니 황보(皇甫) 성을 가진 학생이 유독 많은 거야. 하루는 학생들한테 물었지. 그랬더니 성동리에 황보 성씨가 많이 모여 살고 자기들 조상인 황보인(皇甫仁)이라는 분의 비석도 있다는 거야. 황보인이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어. 설마 계유정난 때 영의정이었던 그 황보인인가 싶어 눈이 번쩍 뜨였지.

선생의 말씀처럼 황보인은 조선의 6대 왕 단종 재위 시절의 영의정이었다. 그는 나중에 세조가 되는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 때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역적의 자손은 삼족을 멸한다는 당시의 법 혹은 관행대로라면 그의 자손들이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텐데,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 말이 역사 교사인 선생에게 놀라움을 안겨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황보 집성촌이 형성된 배경에는 역사 교사인 황인 선생이 몰랐던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황보인 가문을 살려낸 충성스러운 여종 단량(丹良)의 이야기였다. 여종 단량과 황보인 가문의 이야기는 선생이 포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황 인

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