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⑤ 김춘추의 절치부심(切齒腐心)에 무너진 백제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군에 맞섰던 계백 장군의 동상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군에 맞섰던 계백 장군의 동상

서라벌(현재의 경주)에서 황산벌(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이르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경부고속도로와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최단거리 노선도 대략 250km. 600리가 넘는다.

2023년 오늘이라면 쌩쌩 달리는 자동차를 타고 3시간 만에 가닿을 수 있지만, 1천363년 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황산벌전투에 동원된 신라군의 숫자는 5만여 명.

그들 중 말을 탄 지휘관은 소수였다. 무장한 고대 병력이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거리는 고작해야 50리 정도. 멈춤 없이 걸어도 최소 12일이 걸리는 거리다.

황산벌전투가 벌어진 때는 660년 음력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 시기를 요즘 사람들은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는 염천”이라 한다. 옛사람들이라고 더위를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다. ‘개도 지쳐 혀를 한 자나 빼무는 여름’이었다.

5월 말에 서라벌을 출발한 신라군은 무열왕 김춘추와 상대등 김유신의 지휘 아래 한 달하고도 보름에 걸쳐 낮에는 사람을 태워 죽일 듯한 땡볕 아래를 걷고, 밤엔 숲이나 들판에서 노숙을 한 끝에 낯선 백제 땅 황산벌에 닿았다.

그게 여행이라면 ‘고생 끝 즐거움 시작’이었겠으나, 서라벌에서 황산벌까지의 행군은 룰루랄라 콧노래 부르는 소풍이나 원족(遠足)이 아니었다.

곧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무시무시한 전투가 신라와 백제의 병사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최소 1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사했다.

 

의자왕, 윤충 보내 신라 대야성 함락… 항복한 ‘성주’ 머리 잘라
이 소식 들은 김춘추 극심한 충격 받고 사위 죽인 백제 복수 다짐
백제 멸망원인 신라가 기록… 의자왕·왕비·신하 신랄하게 비난
계백 황산벌전투서 5천 결사대로 5만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

◆의자왕을 깎아내림으로써 신라의 백제 침공 정당화

성골 출신이 이어가며 왕을 하던 신라에서 최초의 ‘진골 출신’ 왕에 오른 탁월한 외교전략가 김춘추(무열왕)는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해 한반도를 하나로 묶으려는 큰 야망을 가진 사내였다. 660년 백제 침공은 그런 ‘정치·군사적 목적’ 아래 결행됐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백제의 최고 권력자는 의자왕(재위 641~660). 김춘추는 의자왕을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인식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삼국사기-신라본기’를 보자. 이런 대목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초기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영특한 군주였다. 재위 2년(642)에는 신라를 공격해 미후 등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공격해 점령하게 했다. 당시 대야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品釋)이었는데, 윤충은 품석 부부가 항복을 하자 이들을 죽여 머리를 도성으로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았고,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의자왕의 신하 윤충에게 목이 잘린 품석의 아내 고타소는 김춘추가 문명왕후(문희)에게서 얻은 딸이다. 그러니, 김유신의 생질이기도 했다. 고대 전투에선 항장불살(降將不殺)의 불문율이 있었다.

그럼에도 항복한 사위 품석은 물론 전투와는 무관한 딸 고타소까지 죽이고, 소금에 절인 둘의 수급(首級)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의자왕의 행위는 김춘추의 넋을 나가게 만들었다. 그의 분노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승자의 관점’에서 쓴 역사 아래 의자왕은 정치적으로 무능하며 성적으로 타락한 왕이라 기록된다. 알다시피 660년 신라와 백제와 맞붙은 황산벌전투의 승자는 신라였다.

전북대학교 박노석의 논문 ‘백제 황산벌 전투와 멸망 과정의 재조명’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백제의 멸망 원인은 승자인 신라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에서는 백제의 멸망 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하였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아래와 같은 서술이 등장한다.

“의자왕은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주색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였다. 백제의 군신들은 사치하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이 가득하였고, 신이 노하여 변괴가 번번이 나타났다. 성충, 흥수와 같이 직언을 하는 신하를 감옥에 가두고 멀리하였다. 정부 내에 신구 세력간 권력투쟁으로 국정이 혼미하였다. 신료들이 신뢰하지 않는 왕비의 국정 개입의 도가 지나쳤다…(후략)”

이처럼 백제 몰락 후 신라는 의자왕을 아름다운 궁녀에만 집착하고, 충신을 백안시하며, 영악한 왕비를 내버려둔 혼군(昏君·어리석은 임금)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백제의 관료들을 폄훼하고 ‘신(神)까지 백제를 버렸다’고 신랄하게 비난한다.

이는 신라의 백제 침공을 ‘하늘의 뜻’으로 만들어 백제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고도의 ‘선전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메르 루즈(Khmer Rouge)의 악행을 막기 위해 우리가 캄보디아를 공격했다”고 말한 1970년대 베트남처럼.

 

충남 논산 ‘계백 장군 유적지’엔 계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있다.
충남 논산 ‘계백 장군 유적지’엔 계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있다.

◆멸망의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려 분투한 장군 계백(階伯)

백제사(百濟史)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아닌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 인식 속에 의자왕은 무능한 군주로 각인돼 있다.

그렇다면 678년을 이어지며 31명의 왕이 통치한 백제를 떠올릴 때 가장 긍정적 이미지로 기억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적지 않은 이들이 황산벌전투에서 겨우 5천 명의 병력으로 신라의 5만 대군에 맞서 발군의 전투 실력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꺾이지 않는 기개를 보여준 백제의 명장 계백(출생년 미상~660)을 지목할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계백에 관한 인물 소개를 인용한다.

“계백은 삼국시대 백제의 황산벌전투에 참전한 장수다. 660년 김유신과 소정방이 이끄는 5만여 명의 나당 연합군이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황산벌에 나가 맞았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다짐했다. 결사대의 용맹은 연합군의 대군을 압도하여 처음 네 번의 싸움에서는 모두 승리를 거두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처자를 죽이고 절개를 지킨 그를 충절의 표본으로 여기고 부여 의열사, 연산 충곡서원에 제향했다.”

혼란한 시대는 사서(史書)에 기록될 영웅적 인물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필연에 가깝다. 소설 ‘삼국지’와 ‘초한지’에 등장하는 범증, 장량, 관우, 조운이 그렇고, 우리가 겪은 일제강점기 이봉창과 김원봉이 그렇다.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상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명에 따라 황산벌에 온 신라의 5만 병사를 공포로 몰아넣은 계백은 백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영웅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물론, 그 전투에서 사망한 화랑 반굴과 관창 등 수많은 신라의 병졸 입장에선 ‘사납고 잔인한 적장’이었겠지만.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 기억’이란 상대적이다.
 

황산벌전투의 현장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
황산벌전투의 현장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

◆논산의 계백 장군 묘를 찾아 떠난 먼 길

1천363년이 흘렀다. 황산벌에서 말발굽이 일으키는 먼지와 신라와 백제 병사들의 함성이 사라진 지.

그날 죽은 이들의 시신은 이미 뼈까지 흩어져 진토(塵土)로 바뀌었을 터이고,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럼에도 ‘삼국의 통일’을 이야기하면서 황산벌전투 현장을 직접 찾아보지 않는 건 게으른 처사로 느껴졌다. 그래서다. 초여름 더위가 몰려오던 7월 초순. ‘계백 장군 유적지’로 향했다.

그 옛날 서라벌로 불리던 경주가 지척인 포항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갔다. 대전역에서 대전복합터미널로 이동해 시외버스를 타고 유성과 연무대를 거쳐 논산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거기서 ‘계백 장군 유적지’로 가려면 하루에 8차례 운행하는 307번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을 더 달려야 했다.

그 여정에서 기자의 눈길을 잡아챈 건 ‘계백로’였다. 경주에 ‘흥무대왕(김유신)로’가 있다면 충남 논산엔 계백로가 있었다. 논산에서 시작돼 대전 중구 서대전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이름.

부끄러운 역사 인물의 이름을 따 도로를 만드는 경우는 없다. 변절자 신숙주와 매국노 이완용의 이름이 도로명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처럼.

그러니, 김유신이 경주의 자랑스런 역사 인물이라면, 계백은 자랑스런 논산의 역사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했다.

오전에 포항을 출발해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 앞에 도착했을 땐 까무룩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스며든 황산벌전투 유적지.

660년 7월 10일. 신라군의 칼과 창에 찔려 쓰러진 계백이 삶의 끝자락에서 올려다보던 석양도 그처럼 붉었을까?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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