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고성 그레이스정원

프랑스의 시인인 제라드 드 네르발(Gerard de Nerval)은 모든 꽃은 자연에서 피어나는 영혼이라고 했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꽃을 좋아하는 것은 자연의 영혼과 교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꽃도 유행을 타는 것 같다. 최근까지 가장 인기 있었던 꽃은 유채꽃이었다. 아직도 가을철에는 메밀꽃이 대세고 겨울철에는 동백꽃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꽃은 아니지만 불과 3년 전만해도 전국이 핑크 뮬리(분홍억새)가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2019년 국립생태원에서 핑크 뮬리가 생태계를 교란하는 식물로 지정한 이후 빠르게 퇴출됐다. 핑크 뮬리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이 바로 수국이다. 수국은 한자로 ‘물 수(水)’에 ‘국화 국(菊)’ 자를 쓴다. 이름에 걸맞게 물을 좋아하고 국화처럼 넉넉한 꽃을 피운다. 수국하면 제주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경남 고성에 있는 그레이스 정원은 조금 덜 알려진 수국정원이다. 정갈하게 조성된 수국정원은 이름 그대로 성스러운 느낌마저 준다. 이번 주말에는 탐스럽게 핀 수국을 따라 꽃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일찍 찾아온 더위 탓에 곳곳 수국 ‘만발’
보라색·자주색·분홍색·흰색 물결 장관

주변 자작나무·해국도 멋스러움 더해
군인처럼 도열한 메타세콰이어 ‘볼만’

교회·갤러리·연못은 신비로움 그 자체
기독교인 조행연씨 10여년 걸쳐 가꿔

 

59만5천여㎡ 규모에 조성된 그레이스정원 곳곳에 만발한 수국. 숲 한 가운데 붉은 벽돌로 지은 교회가 이채롭다.
59만5천여㎡ 규모에 조성된 그레이스정원 곳곳에 만발한 수국. 숲 한 가운데 붉은 벽돌로 지은 교회가 이채롭다.

◇수십만 그루 수국이 맞아주는 민간정원

경남 고성 백암산 뒤편에 비밀의 정원이 있다. 2020년 6월 25일 문을 연 그레이스 정원은 수국을 테마로 한 59만5천여㎡ 규모의 민간정원이다. 메타세쿼이아가 마치 군인처럼 도열한 입구부터 보랏빛 수국이 화사한 꽃송이를 자랑한다. 6월 중순은 넘어야 제대로 만개할 터인데 올해는 일찍 찾아온 더위 탓인지 벌써부터 정원 곳곳에서 수국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돌담을 따라 올라가니 구릉과 언덕에도 각양각색의 수국이 만발하다. 숲 한가운데는 붉은 벽돌로 지은 작은 교회도 있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공연장도 있다.

그레이스 정원은 경남 창원의 마금산 온천에서 온천장을 운영하는 조행연(여·78) 씨가 15년에 걸쳐 가꿔온 정원이다. 그레이스정원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눈치 챘겠지만 실상 이 정원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조 씨가 선교센터를 지을 목적으로 만든 곳이다.

정원의 시작은 자신이 운영하는 온천장에 있던 메타세콰이어를 옮겨 심는 것이었다. 길 양옆으로 정갈하게 줄지어 메타세콰이어를 심은 뒤 숲 한가운데 붉은 벽돌로 교회부터 지었다. 그때부터 정원과 식물에 대해 공부했다. 원예와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유튜브를 뒤졌다. 하나하나 공부해가면서 정원 만들기를 진두지휘했다. 10여 년이 넘게 정원을 꾸미는 과정에서 조 씨는 자료를 뒤지고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조언을 얻어 식물과 관련한 실전 지식을 익혔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는 지금도 매일 창원에서 인부들을 태우고 출퇴근한다. 정원에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손수 꽃밭을 일구고 나무와 꽃을 심는다.
 

길 양옆으로 정갈하게 줄지어 선 메타세콰이어. 그 아래 형형색색 수국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길 양옆으로 정갈하게 줄지어 선 메타세콰이어. 그 아래 형형색색 수국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허세 없이 담백하고 성스러운 수국 천국

조 대표가 처음 수국을 심게 된 것은 지난 2006년 창원의 갈멜수도원 수녀들로부터 얻은 수국 300주가 계기가 됐다. 수녀들이 캐낸 수국을 정원에 옮겨 심었는데 이듬해부터 탐스럽게 피어나는 수국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다. 수국이 꽃이 피는 시기나 토양에 따라 전혀 다른 색깔의 꽃을 피운다는 것을 알게됐다. 처음에는 흰색에 가깝다 시간이 지나면 연한 녹색을 띠고 이후 밝은 파란색을 거쳐 자주색이나 분홍색으로 변했다. 심지어 토양에 따라 꽃의 색이 변하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토양이 알칼리성이면 분홍색이 짙어지고 산성이면 푸른색으로 변한다. 중성이면 흰색꽃이 핀다. 새로운 품종의 수국을 수집해 심는 재미도 있었다.

그레이스 정원에서는 다양한 수국 품종을 볼 수 있다. 재래종인 산수국이 특히 많다. 꽃송이가 큰 서양 수국과는 매우 다르게 생겼다. 매우 아기자기하고 화사하면서 품위가 느껴진다.
 

그레이스 정원은 전문가들이 본다면 어딘가 허술해 보일 수도 있지만 허세나 과장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꽃의 생태적 특성보다는 꽃이 주는 위안을 생각하여 만든 정원이라 더 친근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메타세콰이어 길에 한쪽은 수국을 심고 반대쪽에는 경사진 물길을 놓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물소리를 배치한 조경이다. 그레이스 정원의 수국은 청명한 날에도 좋지만 장맛비가 그치고 꽃과 잎의 색감이 짙어질 때 더 청량하다.

정원에는 수국만 있는 건 아니다. 정원 위쪽의 경사지에는 자작나무와 해국을 심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이밖에도 꽃산딸나무, 꽃창포, 수레국화, 옥잠화 등 다양한 꽃을 즐길 수 있다. 온 몸을 휘감아 도는 짙은 풀 냄새를 맡으면서 꽃과 미소를 나누노라면 자연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은총’을 주는지 실감하게 된다. 햇살은 더 농밀해지고 수국을 따라가는 길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행수첩

그레이스 정원은 한 바퀴 둘러보는 데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정원에는 가벼운 산책 코스 외에 깊은 숲속 트레킹 코스도 있다. 이 밖에 숲속 교회, 갤러리, 연못 등 소소한 볼거리가 걷는 재미를 더한다. 입장료는 어른 5천원, 청소년 4천원, 어린이 3천원이며,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연중무휴)다. 주말에는 오전 8시~오후 7시까지 운영한다.
 

만화방초정원 모습.
만화방초정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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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만㎡ 규모 ‘만화방초’

고성에는 또 한곳의 수국 명소가 있다.‘만 가지 꽃과 향기로운 풀들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만화방초(萬花芳草)가 그곳이다. 규모는 그레이스 정원이 더 크지만 수국정원을 먼저 조성한 곳은 만화방초다. 1997년 정종조 대표가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자 수국을 심기 시작하면서 조성한 정원이다.

만화방초의 전체 공간은 33만578㎡인데 이중 6만6천115㎡는 야생 녹차밭이며 야생식물도 700여 종이나 서식하고 있다. 정원에는 200종이 넘는 다양한 품종의 수국이 제 색깔로 자라고 있다.

일부 수국정원이 수국을 보다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인공으로 색깔을 내는 경우가 있지만 만화방초는 자연을 최대한 살리자는 정 대표의 철학을 충실하게 구현했다.

포크레인 작업을 거의 하지 않고 길도 원래 짐승이 다니던 길을 그대로 활용했다. 만화방초는 오래 가꿔온 곳이니만큼 식생도 다양하고 공간도 다채롭다. 노랑어리연꽃이 만개한 작은 연못이 있는가 하면, 계곡 옆으로 울창한 편백나무와 수국이 어우러진 공간도 있다.

편백숲에서 돌아 나오면 기억의 동산이 나타난다. 조용히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추억에 잠기는 장소다. 잠시 마음을 비울 시간을 갖도록 테이블과 의자가 여러 개 놓였다. 햇빛에 색이 바랜 장독 수십 개도 설치됐다. 장독 아래로는 차나무가 자란다. 그 너머로는 고성 전경이 펼쳐진다. 산 아래로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눈이 시원해진다.

만화방초에서 수국이 가장 많이 핀 곳은 수국꽃길이다. 6월 초입인데도 탐스러운 수국이 지천으로 피었다. 정원 위쪽은 벽방산으로 이어지는데 정 대표는 전망대까지 수국을 심어 그야말로 수국천지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