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필칭 ‘계절의 여왕’으로 불리는 5월이 열렸다. 환하고 따스한 햇살, 머리칼을 날리는 시원한 바람 속에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좋은 날들이다.

그러나, 세계와 인간의 역사 속에 마냥 즐거워만 해도 좋은 시절은 없는 것. 한국의 5월은 ‘쉬이 지울 수 없는 아픔’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 명백한 사실은 너도 알고 나도 안다.

“꽃잎에 지는 바람으로 5월을 노래하지 말라”고 일갈한 시인 김남주(1946~1994)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아래 추천하는 2편의 영화를 보며, 이토록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5월의 행복과 더불어 되새겨야 할 이 땅 ‘5월의 슬픔’까지 함께 더듬어보는 게 어떨까.

 

영화 ‘이웃사촌’의 한 장면(위)과 포스터.
영화 ‘이웃사촌’의 한 장면(위)과 포스터.

아프게 떠올리는 이 땅의 1980년대… ‘이웃사촌’

때로는 영화가 입담 좋은 ‘역사 선생’ 혹은 또 다른 ‘근현대사 교과서’로 역할 한다. 그런 경우를 직접 이야기 들은 적이 있다.

몇 해 전이다. 중학교에 다니던 조카딸이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와서는 동생에게 진지한 얼굴로 묻더란다.

“아빠, 옛날엔 진짜로 우리나라 군인들이 죄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총 쏴서 죽이고 그랬어요? 아니죠?”

동생이 뭐라고 답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아직도 학교에선 중학생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건가’란 의문이 생겼을 뿐.

그래도 다행이다. 조카가 백부처럼 캄캄한 골방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비밀스럽게 제작한 ‘광주항쟁 사진집’을 통해 끔찍한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게 아니라서.

1988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책을 펼치고 총 맞아 죽은 광주 청년의 반쯤 감긴 눈을 보며 홀로 경악하던 밤이 잊히지 않는다. 아마 기자가 살아있는 내내 그럴 것이다. 이후로 35년 세월. 세상은 많은 부분 바뀌었다.

비단 기자의 조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택시운전사’ ‘1987’ 등 비극적 한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를 본 중학생들은 자기들 학교 역사 교사에게 “이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사실인가요?”라는 질문을 했을 듯하다. 그 아이들은 어떤 답변을 들었을까?

영화 ‘이웃사촌’ 역시 입담 좋은 ‘역사 선생’ 혹은 또 다른 ‘근현대사 교과서’의 역할을 자처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민주화 이전, 공간적 배경은 한국, 밑바탕에 깔린 메시지는 ‘슬픔과 저항’이다.

상영 시간은 2시간 10분으로 꽤 길지만, ‘이웃사촌’의 스토리 라인은 몇 줄로 정리가 가능할 정도로 간명하다.

DJ(김대중)와 YS(김영삼)를 섞어놓은 듯한 민주화운동 투사(오달수 분)가 있고, 그를 감시하는 정보기관의 공무원(정우 분)이 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투사의 진심을 알게 된 정보기관 직원은 그간 살아온 삶의 태도와 지향을 180도 바꾼다. 시대의 슬픔을 자기희생과 저항을 통해 이겨낸 둘의 재회로 영화는 마무리.
 

무소불위의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한국을 다룬 영화 ‘이웃사촌’.
무소불위의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한국을 다룬 영화 ‘이웃사촌’.

정치적으로 끔찍했던 한국의 1980년대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우리를 울리다가 웃기고, 서럽게 만들다가 깔깔거리게 한다.

감독 이환경의 스타일은 말 잘하고 재밌는 역사 교사와 닮았다. “감정 과잉에 신파적이라 영화가 19세기 동화 같다”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쩌랴. 그게 ‘7번 방의 선물’ 등 전작들에서 이미 봐온 이환경의 패턴화 된 영화 연출 방식이라면 인정할밖에.

조연들의 빼어난 연기력은 ‘이웃사촌’의 핍진성을 높여준다. 지난시절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속 정보기관의 고위직 역을 맡은 배우 김희원은 “악역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소화한다”는 세간의 평가에 값하는 연기를 이 작품에서도 보여준다.

민주화운동 투사의 딸 역할로 나온 이유비의 눈빛 연기는 극장 안 사람들의 서러워서 뜨거워진 가슴에 기름을 붓는다. 제법이다. 기대하지 못했던 연기력이라 불러도 좋을 듯했다.

어쨌건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에 카메라를 들이댄 또 한 편의 ‘좋은 영화’로 점 찍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기자 외의 관객과 평론가들에게는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이제는 대학생이 된 조카딸은 ‘이웃사촌’을 봤을까? 봤다면 또 동생에게 질문을 던졌을까? 그게 아니면 제법 컸으니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이 땅의 1980년대를 기록한 책을 읽었을까?

조카의 의문에 답해줄 좋은 역사책 한 권 선물하고 싶은 5월이다.
 

일제강점기 한국 소녀들이 겪었던 비극에 카메라를 들이댄 ‘귀향’.
일제강점기 한국 소녀들이 겪었던 비극에 카메라를 들이댄 ‘귀향’.

누가 소녀들을 지옥으로 보냈나?… ‘귀향’

‘태백산맥’을 쓴 소설가와 동명이인인 조정래. 그는 14년에 걸쳐 한 편의 영화를 위해 제 생의 많은 시간을 바쳤다.

놀라운 건 7만5천270명. 어떤 이익단체도 쉽사리 끌어 모을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이 몇천 원 또는, 몇십 만 원의 돈을 기꺼이 쾌척해 이 영화가 개봉되길 열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례가 드문 일.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위해 이른바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는 건 한국인들이 적극적 예술향유자로 문화계 전면에 등장했다는 걸 증명하는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전쟁. 개인의 의지를 압도하는 집단의 지향에 의해 상처받고, 고통 받은 이들이 적지 않다. 이는 비단 일본이 획책했던 태평양전쟁에 한정되지 않는다.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은 말한다. “전쟁이란 인간이 구축해온 합리적 이성이 무너지는 순간”이라고.

긴 이야기는 필요 없겠다. 영화 ‘귀향’. 개봉 당시, 터무니없이 적었던 개봉관으로 상영했지만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반자본적 기현상이 나타났고, 영화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눈물을 흘렸다는 주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기자 역시 그런 상황 속에서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다.

오늘날, 제2차대전의 와중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쟁터로 끌려가 인권을 유린당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짓밟히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은 여성들이 많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귀향’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부정하거나 거부할 사람들 역시 적다. 그 당시 어떠한 일이 일어났고, 그 끔찍한 역사적 사건 탓에 보호받아야 할 한 개인의 삶이 타의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것 역시 대부분이 알고 있다.
 

영화 ‘귀향’의 한 장면. /영화 홈페이지
영화 ‘귀향’의 한 장면. /영화 홈페이지

‘귀향’은 기본적 역사인식만 갖췄다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화다. 입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

“1930~1940년대 아무 것도 모르던 소녀를 끌고 가 그들을 고통 속에 빠뜨린 일본의 군인들은 나쁘다” 혹은, “제국주의의 야욕 달성이라는 전체주의적 욕망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킨 일본의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등.

사실 ‘귀향’은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와 스토리·구성의 핍진성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하루 한 끼 챙겨 먹기도 힘들만큼 가난이 보편적이었던 1940년대 한국 농촌을 유토피아로 묘사한 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수난을 겨우 등에 드러난 푸른 멍자국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한 것, 전투 장면에서 보이는 제국주의의 저항세력이 중국인인지 한국독립군인지조차도 알 수 없게 만든 역사 재현의 조악함, 억울하게 죽어간 소녀들의 죽음을 해원하는 방식이 겨우 무당의 굿판을 통해서였다는 점 등. 곳곳에 산재한 부족한 부분들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귀향’은 사람들을 울린다. 왜 그럴까? 답은 매우 단순하다. 겨우 열네 살 소녀가 자신이 ‘이상향’으로 꿈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 거대한 시스템, 그것을 향한 반감 때문이다. 바로 제 욕망을 위해 수백 만 명의 인간을 희생시킨 일본 제국주의.

이처럼 간명한 영화적 결론이라면, 여기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세간의 인식과는 또 다른 저서를 펴내 비난을 화살을 맞고 있는 세종대 박유하 교수도 들먹일 필요가 없고, 일본 정치권과 현실적 실익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한국 정권의 입장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왜냐? 아픔과 그 아픔을 넘어서는 카타르시스란 어차피 객관이 아닌 주관의 영역이기에.

이렇게 말해보자. 세상의 어떤 일은 복잡한 논거와 긴 설명 없이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영화 ‘귀향’이 그 안에 담고 있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왜, 열네 살 어린 조선 소녀가 부모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타의에 의한 죽음을 맞았던가? 그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 답변이 너무나 빤한 질문.

때론, 삼척동자도 아는 쉽고 분명한 사실이 사람을 울린다. ‘귀향’이 가진 기술적 흠은 관객의 눈물을 부르는 역사적 사실을 이기지 못했다.

해서, ‘귀향’은 영화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어떤 빛남을 지닌 영화다. 그 빛남에 우리가 안아줘야 할 약소국 소녀의 피가 묻어있을지라도. 해서, 이 빛나는 햇살 아래 5월에 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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