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시간이 흐른다. 어제가 세월호 대참사 9주기였다. 참으로 신속하다. 열일곱 열여덟 살 먹은 단원고 2학년 학생 250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난 지 9년이 흘러갔다니 실감 나지 않는다. 결코 일어나서는 아니 되는 사건으로 생떼 같은 청춘 250명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자들은 희희낙락하며 절을 찾아다니며 정치 행각을 해대고 있으니 목불인견(目不忍見)이 아닐 수 없다.

참혹한 사건이 벌어진 그 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구들방에 장작불을 넣고 있었다. 촌집으로 들어온 지 3주 남짓 시간이 흐른 때였다. 저녁 어스름 무렵 뒷집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당신 집으로 들어섰다. 왜 그러세요, 하는 내 물음에 텔레비전도 안 봐, 하고 대답한다. 집에 텔레비전 수상기가 없던 나는, 안 봅니다, 했다. 그랬더니, 이를 불쌍해서 어쩌누, 하면서 연신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 나는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참사가 벌어졌다는 걸! 그 후 강의실에서 나는 경북대 학생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나 같이 나이 먹은 자들의 잘못이라고!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해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유민 아빠 김영오씨와 동조 단식을 하러 광화문으로 갔다.

8월의 후텁지근한 기운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음습하고 뜨거운 열기와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매연 속에서 수도승처럼 앉아 있던 그이를 잊기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46일 동안 단식을 이어간 그의 초인적인 행동은 놀라운 것이었다. 단 한두 시간만 그런 자세로 앉아 있으면 무슨 말인지 실감할 터다.

이듬해인 2015년 4월에 나는 청도에서 출발해 진도 팽목항 분향소에 다녀왔다. 6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진도 남쪽 끝에 자리한 팽목항 분향소 근처는 노란색 물결이었다. 305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던 분향소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영정 사진들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많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저토록 많은 생명을 앗아간 자들은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온갖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도는 느낌이었다. 제 나라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희희낙락하는 정치 모리배들의 파렴치한 철면피는 마치 철가면(鐵假面)처럼 주둥이가 째진 채 허연 이를 히죽 드러내고 웃는 것만 같았다.

작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젊은이 159명이 다시 죽어 나가는 참사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고 뭉개고 있는 정부 여당의 행악질과 후안무치는 전임 정권과 판박이다. 툭하면 선진국 타령하는 인간들의 가증스러운 행태가 되풀이되는 와중에 발생한 대참사였다. 젊은이들과 어린 학생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작태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세월호 9주기의 소감이다. 올해도 조기(弔旗)를 내걸고 젊은 영혼들의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