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타로 카드로 나를 보니까 거꾸로 매달린 남자 ‘행맨’이 나온다. 인식대상을 거꾸로 보는 인간이 행맨이다. 사람들이 대상을 보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상을 보는 행맨. 어쩌면 그것은 나도 알고 있던 속성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그것을 온존·강화해온 것도 틀림없는 나였다.

나는 남들처럼 보는 것도 행하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싫었다. 나름의 고유하고 독특한 별세계를 구축하고 확장하고 싶었던 때문이다.

나를 그렇게 키워온 배경에는 타고난 성정 말고도 집안 분위기와 사회·역사적인 환경이 자리한다.

‘국민교육헌장’을 강제로 외워야 했던 어린 시절, 10월 유신을 외쳐야 했던 중학 시절, 교련 검열을 받아야 했던 고교 시절,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던 학부 시절, 그리고 광주 학살과 신군부의 철권통치,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과 대선 패배에 이르기까지. 끝없을 것 같던 압제와 폭력과 죽음과 검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던 저 암흑의 20세기 중후반!

수줍고 내성적이며 우울한 기질의 소년은 세월과 더불어 청년이 되고 장년을 지나 초로의 단계에 들었다. 삶에 대한 그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견고해져서 이제는 화강암 수준으로 단단해졌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진 내면세계는 타자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물 한 방울 스며들 공간조차 없을 만큼 굳어진 자아는 행맨의 면모를 훨씬 강고하게 인도한다. 그런 자아에 구원이 가능할 것인가?!

세상에는 ‘인연’이 존재한다. 언젠가 손에 들게 된 불가(佛家)의 책들이 여러 각도로 문제를 던진다.

‘벽암록’, ‘붓다 연대기’, ‘반야심경’, ‘금강경’, ‘법성게’ 등에서 나는 오랜 수수께끼와 대면한다. ‘그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주역’ ‘계사편’에 나오는 ‘무평불피 무왕불복’이란 말도 있지만, ‘생자필멸 거자필반’ 역시 소용되는 구절 아닌가?! 그러다 ‘오온개공(五蘊皆空)’에서 꽉 막혀버렸다.

‘색수상행식 오온’이 왜 모두 공하다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반야심경’ 260글자는 그저 글자로만 남는다. 2년 넘도록 생각했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어느 날 ‘법문’을 듣다가 ‘저렇게 이해하면 되겠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이 찾아온다.

문제는 나의 분별하는 마음과 분별에 기초한 얕은 지식이 깊고 너른 이해를 방해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굳어진 세계인식과 사고방식이 장애물인 셈이다.

인식대상이 인간이든 사물이든 세상이든 현상이든 나의 분별은 너무도 강력하고 완악하여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내면에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 무장한 채 똬리를 튼 자아의 철옹성을 스스로 혁파하지 않으면 출구는 없다. 굳어진다는 것은 젊은 시절에는 자아확립 차원에서 유용한 덕목이지만, 나이 든 연후에는 거대한 걸림돌로 작동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강력하되 부드러워질 수는 없을까?!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설파한 노자를 다시 읽어봐야 할 모양이다. 부드럽고 연약한 물에 내재한 강력한 물성과 본성을 재삼 살펴야 할 때가 왔나 보다. 봄이 멀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