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문경 수필가
배문경 수필가

바람이 분다. 건물과 담벼락 사이로 세찬 바람이 지나간다. 담장아래서 병아리처럼 아이들이 모여 햇빛바라기를 했다. 흙담은 따뜻했고 바람을 피해 앉아서 종알종알 어린 우리의 일상은 바람을 맞지 않아 좋았다.

형제가 떠난 자리는 허전했다. 언니 둘이 결혼해서 어린 나를 놔두고 자신의 둥지로 떠났다. 애지중지 머리를 닿아주고 서캐를 옮겨왔을 때 참빗을 들고 머리를 쉴 새 없이 빗어 내리던 언니들의 빈자리는 가을 추수한 들녘처럼 쓸쓸했다. 어린 막내라고 목마를 태워주던 오빠들이 그리워 담벼락에 붙어 서서 자주 훌쩍였다. 해가 뉘엿해지면 덩달아 그늘진 담은 더 차갑게 나를 밀어냈다.

어둠살이 내리던 골목길 담벼락은 나처럼 혼자일 때가 많았다. 인적이 끊긴 겨울 늦은 시간이면 졸고 있는 전봇대가 불을 밝히고 긴 그림자를 끌고 피곤한 진수네 아버지가 지나갔다. 자주 술을 마신 채 비틀거렸다. 동네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우당탕탕 시끄럽게 귀가했다. 서로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동네가 떠들썩하게 사랑했던 순자언니의 사랑은 담 그늘에서 사랑의 꽃으로 결실을 맺었다. 담장 너머로 서로를 향한 뜨거운 눈빛이 마주쳤던 모양이다.

요즘은 담장에 스토리를 그려 넣거나 문화재나 시(詩)를 보기 좋게 써두지만 그때는 무서운 가위가 그려지거나 귀신같은 것이 자국을 남겨두곤 했다. 싸리를 꽂아 담장을 쳐둔 창식이네 집은 멀리서도 뭐하는지 다 보였다. 하지만 뒷집 기와집 할배네 집은 담장이 높았다. 철대 문이 한 번씩 삐거덕 거리며 열렸지만 간혹 사람보다 가래 뱉는 소리가 더 잦았다. 새벽이면 그 집에서는 요강을 들고 나와 밤새 볼일 봐둔 것을 개울물에 부어 버리곤 했다. 혼자만 대단한 듯이 담장을 높인 집이라 사람들도 얼씬 하지 않았다.

최근 한양도성 탐방이 인기라는데 서울을 두른 성문과 성곽이 과히 높지 않다고 한다. 소실된 성곽이 상당 부분 복원되면서 한양도성(성문과 성곽)을 돌면서 풍경을 감상하는 순성(巡城)놀이다. 한양을 둘러싼 도성에는 8개의 성문이 있고 성곽의 길이는 40리(18.6km)다. 하루에 한양 성곽을 다 돌면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한다는 속설이 생겨나면서 순성놀이는 더욱 유행했었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성, 궁궐, 성곽 짓기였단다. 울창한 소나무 숲도 곳곳에 보이고 공간을 아늑하게 만드는 조선식 조경기법인 취병(翠屛)이 있다고 하니 나도 언젠가 낮은 성을 돌며 서울구경을 제대로 해볼 참이다.

지금은 살만큼 살아서 일까. 어디에 가더라도 주위를 파악하고 행동하지만 어릴 때는 주눅이 잘 들었다. 보리자루처럼 서있었다. 그렇지만 몸이 가벼워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는 혼자 타잔처럼 담장을 타고 놀고 집 뒤란에 서있는 감나무에 올라 노을을 혼자 보곤 했다. 담장은 계단처럼 느껴졌다. 차곡차곡 올려둔 블록 위에 올라서면 세상이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싶다는 것도 그때 간곡히 기도한 때문이지 싶다.

오래되어 낡은 것들이 정감 있게 살아나던 부산 감천마을을 떠올려보면 집의 담장 들이 서로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옆집이 무엇을 하는지 쉬이 알 수 있었으리라. 담은 가리개가 되고 혹은 적당한 소통의 간격으로 보였다. 곳곳에 그려진 그림은 삶이 묻어나 있고 벽을 스치며 그림과 조우하는 나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다.

이제 높은 담장을 쌓아 경계를 두는 일들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낮은 꽃 화단이 겨우 이곳과 저곳을 나눌 뿐이다. 내 것이 허물어지고 타인이 들어올 때 소통은 훨씬 편해진다. 곳곳에서 공사하는 현장들도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내 것이 열리고 타인을 받아들여야 공감의 장은 넓어진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공광규의 ‘담장을 허물다’)

나또한 생(生)의 담장을 낮추어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으로 맞고 인연을 맞고 기쁨을 맞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