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안토니오 마르티니作 ‘1787년 파리 살롱전 전경’.

미술이 본격적으로 제도권 기관에서 교육되어진 것은 1648년 프랑스에서였다. 프랑스 보다 80여 년 앞선 1563년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에 의해 피렌체에 ‘아카데미아’가 설립되기는 했었지만 이곳은 미술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학술적 논의가 이루어진 미술원의 성격이 강했다. 프랑스 왕립아카데미 역시 미술원의 기능을 일부분 수행하기는 했지만 일차적인 역할은 절대왕정의 통치철학에 부합하는 미술가를 길러내는 것이었다.

아카데미에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고 오랫동안 미술창작의 규준으로 작용하게 될 이론들이 정립되었다. 예를 들어 역사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 주제에 따라 회화 장르를 구분한 것이 아카데미이다. 이렇게 회화를 구분한 것은 장르 간에 서열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역사화는 성서나 신화, 역사적인 사건을 주제로 다룬다. 주로 위대한 인물들의 영웅적인 행위가 묘사되어 있다. 역사화는 가장 높은 서열에 위치해 있다. 반대로 서열이 가장 낮은 회화 장르는 풍속화이다. 풍속화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사화를 그려야 했다. 오로지 역사화를 그리는 최고 실력의 화가에게만 왕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서양미술사 최초 대규모 전시회의 시작도 아카데미에서 찾을 수 있다. 루이 14세 치하, 왕실에서 추구하는 미술취향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1667년 전시회가 기획되었다. 처음에는 아카데미 강당에 작품을 걸고 시작된 전시회가 왕실의 요청에 따라 매해 정기적으로 개최되면서 몇 차례 장소가 변경된다. 1725년부터 아카데미 전시회 개최장소가 루브르 궁전 살롱 카레(Salon Carr<00E9>)의 붙박이 행사로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살롱전’이라 불리게 된다.

아카데미의 교육과정은 체계화 되어 있었다. 신입생들은 거장들의 작품을 옮겨 놓은 판화를 모범 답안처럼 열심히 따라 그려야 했다. 거장들의 눈을 빌려 구도를 파악하고 인체와 인물 묘사를 익혔다. 그런 후 석고상으로 데생 연습을 한다. 평면을 평면에 모사하는 것과 입체인 석고상을 평면에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석고상의 입체적인 형태를 분석하고 비례와 균형 그리고 빛이 닿는 면과 그림자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설득력 있는 그림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을 모두 마친 학생들은 실제 모델을 그리는 수업에 참여한다.

아카데미는 해마다 ‘로마상’이라는 공모전을 열어 뛰어난 학생을 선발해 로마로 유학할 기회를 주었다. 17세기와 18세기 미술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간다면 로마로 향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고대 유적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로마에서는 아카데미가 모범으로 삼았던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들이 여전히 존재감을 뿜어냈다. 당시 미술의 최신 유행 바로크가 로마에서 발달했고, 각국의 미술가들이 활발하게 교류한 곳이 로마였다. 프랑스 왕실은 로마의 메디치궁을 매입해 그곳에 왕립미술학교 분관을 설치했고, 기량이 뛰어난 학생들을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해 수년 동안 유학할 수 있게 있다.

프랑스의 이 같은 미술환경 속에서 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엘리트 코스는 다음과 같다. 명망 높은 미술가의 문하생으로 기본기를 다지고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몇 년간의 유학생활 동안 수준을 한껏 끌어올린 후 파리로 돌아와 살롱전에 출품해 주목을 받고 궁정화가로 발탁된다. 궁중화가로 일하면서 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영향력을 펼치면 화가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권력을 얻게 된다.

유럽 여러 나라들은 프랑스를 모범삼아 왕립미술학교를 세웠다. 1713년 마드리드에 스페인 왕립미술학교가, 조금 늦은 1768년 영국 왕립미술학교가 설립되었다. 프랑스 왕립미술학교는 1791년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1803년 미술학교 보자르(Beaux-arts)로 새롭게 문을 열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